22년 스승의 날 편지(아직 늦지 않았음을)

by 청블리쌤

학교에서 스승의 날을 앞두고 감사의 편지 쓰기 시간이 있었다. 반 학생들에게 담임한테는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이유를 묻자 “난 너희들의 스승이 아니다!”라고 말하니까 어떤 학생이 “스승이 아니시면 동네 아저씨인가요?”라고 되물었다.

더 이상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스승이라는 명칭은 학년을 마치고 나서야 붙을 수 있는 것이고, 지나고 나서 감사를 느끼는 게 진심인 거라고 일일이 설명을 하며 납득시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년 학생들 중 몇몇이 진학한 고등학교 행사로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내용 중 아이들의 후회와 아쉬움의 흔적만 일부 발췌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단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요.

여러 고민들을 하다가 선생님의 블로그가 생각났어요. 그리고 저희가 고등학교 가기 전에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어요. 이럴 때일수록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고 영어공부 계획과 방법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려고요.



작년 중3 담임을 하셨을 때, 고등학교 준비, 진로 찾기, 상담 등 저희의 원활한 고등학교 생활을 위한 조언을 많이 해주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와닿습니다. 그 당시에는 단어를 왜 외워야 하며, 글을 왜 읽고 댓글을 달아야 하는지, 학습플래너를 왜 짜야 하는지 등 선생님의 조언을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그 시간들이 후회됩니다. ‘중학교에서 이렇게 빡세게 해야 되나?’, ‘고등학교 가서 하면 되지 뭐’ 등 중학교 때까진 그 시간들의 중요성을 잘 몰랐습니다.

지금도 중학교 후배들을 가르치고 계신다면, 중학교 과정의 중요성과 저 같이 망한 선배들 얘기를 해서 그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도록 해주세요.



선생님 말씀 더 잘 듣고 시키시는 대로 했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후회도 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대하여 거의 몰랐었는데 많이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되고 있지만, 선생님께서 안 알려주셨으면 더 심각했을 것 같아요.



영어를 열심히 가르쳐주셨고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영어공부를 하면 되는지도 알려주셨고, 졸업선물로 주신 책도 열심히 보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저를 잘 보살펴 주셔서 고생 많으셨어요. 성적 등으로 좀 심란해져 있었을 때 정신 바짝 차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생활하다보니 중학교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은데요. 그래도 밝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작년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침 단어시험이예요. 확실히 고등학교 들어서니 단어도 어려워지고, 뜻도 다양하고 영어가 조금 어려워졌어요. 그래도 학교에서 단어시험을 치는데 중3때가 생각이 나더라구요. 열심히 하기를 정말 잘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는 영어책을 다 외워서 시험을 치니 높은 점수였는데, 외울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다 외우지도 못하고 시험을 치니 더 긴장 되는 것 같아요ㅠㅠ 쌤, 저 어떡하죠?

쌤이 말씀하신 것들, 그러니까 고등학생에게 필요한 걸들을 다 할 걸 그랬나봐요ㅠㅠ



아이들의 편지 곳곳에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해주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후회라는 감정도 떠올리는 것이니 안타까운 마음 한편에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희망을 품게 되었다. 당장의 아픔으로 인해 주저앉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응원의 마음이 차올랐다. 후회라는 건 뭔가 열심히 해보려는 결단이자 시작점일 수 있는 거니까...


그러면서 현재 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반장, 부반장을 불러다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부담스럽고 납득되지 않는 학생들이 여전히 있을 거다. 너희 작년 선배들이 약간의 후회를 담아서 내게 편지를 보냈다. 자기들처럼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마음도 담아서...

교생선생님이 가시고 나면 반 아이들이 납득을 하든 안 하든 난 소신껏 더 확실하게 교육을 이어갈 거다.

그래서 아무도 고등학교 가서 내 말을 실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뭐가 어렵단 말이지?' 이런 의문만 남기를 바란다.


대구여고에서 언젠가 고1 학생들에게 고3 학생들이 시기별로 공부를 안 하게 되는 이유를 실감 나게 얘기해 준 적이 있다. 그 학생들이 고3이 되어서 나를 볼 때마다 내 말이 시기별로 다 들어맞는다고 신기해했다. 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선언이나 예언이 아니었다고, 그러지 말라고 해준 말이었다며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아이들이 고3이 되어서 나의 말을 하나도 실감하지 않기를 바랐다.


난 시간이 지나서 아무도 내게 고마움을 느낄 일이 없기를 소망하며 교사의 자리를 지킨다. 또 이미 내가 필요 없는 그 순간을 완성해서 떠나보냈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받은 스승의 날의 편지 중에 가장 희망적이고 가장 감동이 되었던 편지 한 편을 소개한다. 현재 중3 학생이 준 편지였다.



항상 수업 시간마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열심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어단어 외우는 팁, 외워야 하는 필수 단어들 항상 도움 되고 있어요.

멘토링에 진심을 쏟으시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시려 노력하시는 모습이 감동이었어요. 담임으로 반 학생들 지도하시기만 해도 벅차실 텐데 힘든 내색 없이 다른 반의 영어교사로서, 멘토링의 청블리 선생님으로서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학기 초에는 선생님이 무서워 보이셔서 청블리라는 애칭이 살짝 의문이었는데 요즈음에는 실제 존함은 잊어도 ‘청블리쌤’은 못 잊을 정도로 머릿속에 박혀버렸어요ㅎㅎ

사실 요즘 시험 끝나고 공부에 슬럼프가 온 건지 아무것도 하기 싫고 뭘 하더라도 제대로 집중되질 않더라고요ㅠㅠ 그래서 멘토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화내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학원을 다니면서 왜 이런 걸 외우나 싶었던 단어도 있었고, 왜 모의고사 문제의 유형을 알려주기보다 먼저 모의고사부터 풀라고 시키시는 건지 이유도 모르고 불만만 가진 채 학습해왔어요. 내신 기간마다 해석된 문장조차 주지 않고 그냥 외우라고 14장의 본문 종이를 돌리고 맞을 때까지 반복시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에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그건 잘 못된 거라고 말씀해 주셔서 제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학원을 끊었어요. 감사합니다ㅎㅎ 다음 시험은 내신대비도 혼자 해보려고요. ...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이 아이를 포함한 나를 만난 모든 학생들이 고등학교 가서도 즐겁게 영어공부를 누리면서 뭐가 어렵다는 것인지, 점수가 안 나와서 고민이 될 일이 뭐가 있다는 건지 의아해 하기를 바란다. 청블리쌤이라는 존재가 강렬하게 기억나지 않고, 내가 그토록 강조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실감 나지 않고 잊혀지기를 바란다.


물론 이왕이면 후회나 아쉬움은 최소화할 수 있게 편지의 중3학생처럼 지금 이 순간에 더 충실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제자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아직 늦은 건 아니라고... 후회나 아쉬움이 있다는 건 희망의 증거이기도 하다고. 아무리 급해도 단계를 지키면서 꾸준하게 묵묵하게 해나가기를... 결국은 도달할 것이니 소망과 희망을 품으라고...


더 좋은 출발은 더 먼 과거에 있지만 그건 이상 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이 출발점이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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