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는 <읽다>라는 책에서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그리고 재구축된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 해럴드 블룸
소설은 두 번째 삶이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게 꿈이니까.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는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모순된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온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둔다.
- 오르한 파묵
김영하 작가는 소설을 읽는 것은 헤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이며, 주인공의 여정에 참여하여 그 세계의 일원이 되는 독자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 가게 된다고도 말한다.
김영하 작가의 <읽다>는 소설을 읽는 것에 대한 충분한 당위성과 근거를 다양한 작품을 인용하고 분석하면서 설득력 있게 풀어낸 책이다.
소설 속의 세계는 자연처럼 불변하며 그저 독자의 반응만 바뀐다고 한다는 대목에서 동일한 수업에 대해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삶의 체험을 떠올렸다.
그리고 교사로서의 읽기와 쓰기에 대해 생각을 넓혀보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썰을 풀 때가 있다. 아이들의 요청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설계된 수업관련 포인트에서 이어지는 자신의 이야기이며 삶으로 말하는 소설 같은 현실을 제시한다.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다. 두 딸들도 학교 수업받은 내용보다 선생님의 썰에 대해 받은 강렬한 인상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선생님들의 삶의 모습은 아이들에게는 꿈의 모습일 수도, 선망의 대상일 수도, 겪고 싶지 않은 회피경험일 수도 있다.
소설 속의 인물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현실성 있고 진짜 같은 현실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옳다. 극적이지 않거나 많이 재미있지 않아도 아이들은 무조건 반응한다. 그게 교사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학생들과 평소에 교감이 더 이뤄져서 관계형성이 잘 되어 있다면, 썰렁한 첫사랑 얘기에도 아이들은 감동한다.
늘 내게 말로 뼈를 때리는 제자가 내게 끊임없이 이런 사실을 상기시킨다.
학교를 떠나면 누가 그렇게 선생님을 인정해 주고 따르겠냐고. 아이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본인의 객관적인 매력이나 능력에 대해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인기는 허상이니 자아도취에 빠지지 말라고.
맞는 소리다. 얼마 전 유키즈라는 프로그램에 입학식 때 아이돌 노래로 공연하는 이화여대 교수 중창단이 출연하였다. 교수님들이 대학생 취향에 맞춘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파격적인 시도이며 아이들을 위해 그렇게 애쓰시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고 충분히 이슈가 될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화여대 입학식 때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화여대생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객관적인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공연이 의미가 있던 것은 입학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상관있는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아이들이 내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신기하게 보고, 반응을 해준다고 해서 내가 가수로 데뷔하려 하거나, 버스킹을 하려고 한다면 그건 자아도취를 넘어선 망상일 것이다.
우리가 부모로서, 교사로서, 친구로서, 선배로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객관화된 감정의 반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 정도로 사랑스럽거나, 어떤 자격을 갖추었거나, 감탄할만하거나, 내게 무슨 이로움이 있어서 그런 이유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의 부족함도 있는 그대로 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는 자신의 삶을 일정한 척도로 상대평가 당하듯 아이들에게 억지스럽게 보여주거나 다가갈 필요는 없다. 애쓰고 노력해야 하지만, 아직 부족한 모습 그대로라도 괜찮다.
우리가 삶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런 의미다.
교재연구를 통해 삶과 밀착된 예문과 사례를 제시하고, 삶에 적용되는 이야기로 배운 내용을 확장하고, 그리고 교사의 페르소나 뒤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책을 벗어난 삶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 같은 더 큰 교육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교사와 학생의 교감이 이뤄지는 그 지점에서 불꽃같은 교육의 변화가 일어난다. 당장 그 변화가 감지되지 않더라도 조금씩 균열 같은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예측 정도는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는 직접, 간접 체험을 늘려가야 한다. 그저 삶을 풍성하게 사는 것...
그 풍성한 경험과 충만한 행복이 아이들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와 삶에 대한 배움으로 전해진다.
이왕이면 아이들이 바랄만한 사랑을 하고, 삶의 가치를 이뤄가는 것이면 더 좋겠지만, 부족한 모습이라도 아이들이 후회를 막을 수 있는 체험이라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교사와 부모는 완전을 추구하더라도 완전해질 수 없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위로와 힘이 된다. 결국 우리 자신의 삶에 예의를 다하며 매 순간 진심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아이들과 만나는 현재라고 불리는 그 순간이 가장 유의미한 진심의 순간이다.
교사의 글쓰기는 말로만 하는 교육활동이 채워줄 수 없는 빈틈을 상상 그 이상으로 채워줄 수 있다. 교사의 글쓰기는 교실 밖 교육에서도 활용된다. 내 경우는 블로그의 교육노트와 독서노트 등의 글 중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민감한 사안들은 피하고,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로 혼란을 줄만한 글을 제외하여 아이들이 정기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글 읽고 댓글달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온라인 읽기 활동을 한다. 신문 사설이나 문학발췌 글 등 좋은 글들에 나의 글도 포함해서 아이들에게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공유하며, 아이들의 댓글로 소통하기도 한다. 막연하게 많이 읽는 것은 문해력이라는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그치지만, 이런 삶을 관통하는 소통과 공감은 삶과 인생에 대한 아이들의 시선을 확대하고 따뜻하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까지 채워줄 수 있다.
수업시간에 영어 예문을 선정할 때도 삶의 소중한 가치를 담아낸 문장을 찾아 헤매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학급이나 멘토링 학생들에게 편지를 써주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받으면 답장을 하며 쓰는 것으로 소통한다. 아이들은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너무 유창하게 잘 한다는 것을 너무도 많이 체험했다. 쓰기라는 통로는 그래서 말하는 것에 추가된 하나의 채널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유일한 학생들과의 소통 채널이 되기도 한다.
말로 해도 의미는 통하지만, 글로 했을 때 그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음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나 쓰기는 읽기의 다음 단계다. 내 블로그의 독서노트와 교육노트는 특히 책을 읽고 나서 중요 대목을 발췌한 것으로 쓰기가 시작된다. 발췌할 정도로 구체적인 읽기의 흔적이 없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책을 읽고 나면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미세하게라도 달라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언급한 존재 양식의 변화처럼)
우리는 읽음으로 성장하고, 그 읽기의 체험으로 쓰기가 발현된다.
물론 삶에 대한 읽기는 반드시 활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직접 체험이나 영상매체를 통해서도 삶에 대한 읽기가 실현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활자는 우리의 삶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구체화된 증거 같은 기록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경험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희소식은 그런 읽기 체험이 축적될수록 늘어나는 문해력으로 점점 더 빠른 시간에 많은 체험이 가능해지며 보는 시각도 계속 넓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일상을 넘어선 삶을 살 수 있고, 그로 인해 달라진 일상도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사가 성장한다는 것은 만나는 아이들도 함께 더 성장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니, 교사는 매 순간의 일상이 숭고하고 웅장할 수 있다. 오히려 사소한 일상의 변화로도 그런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삶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늘 읽기를 강조한다. 당장 국어를 포함해서 공부를 잘하는 내공의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준비된 문해력만큼만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읽기가 축적되면 어느 순간 흘러넘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건 쓰기로 대개 발현된다.
그런 쓰기를 할 때는 처음부터 쓸 거리를 다 준비하거나, 쓸 내용을 다 구상하는 것이 아님에도 어떤 하나의 자극으로도 자신도 예측할 수 없던 글의 흐름과 완성에 놀라기도 한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서 쓰게 되는 것이 아니라 쓰기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마중물 같은 자극만, 그런 사소한 영감만 있으면 된다.
김영하 작가의 <읽다> 책을 읽고 떠오른 영감으로 간단한 메모를 하려는 시도가 의도하지 않게 이렇게 나름 한 편의 글이 된 것이 나도 신기하다.
어쨌거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경험치를 공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공유의 과정에서 공감이 일어나면 각자 자아의 일부가 재구조화되고, 그런 경험들이 모여 일련의 성장을 이뤄간다. 읽기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더 큰 성장을 이루는 의도적 선택의 과정이다. 그리고 쓰기는 그 성장에 대한 보고서와 같은 결과물이며 다른 이들과의 공유와 공감의 통로가 된다. 심지어 기억나지 않는 예전의 성장의 기록을 마주하는 설렘을 누리는 기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