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청춘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본 이후로 요즈음 내 마음을 계속 울리는 노래다. 노래를 너무 사랑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줄 기회를 얻기 위한 오디션 참가자들의 절실함까지 더해져 가슴을 더 울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QV6YSaj8XOU&list=RDMMQV6YSaj8XOU&index=1
최근 이별에 대한 정말 좋은 책을 만났다.
이별의 푸가- 김진영
이별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과 상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별을 외면할 수 없다. 때로는 이별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고통으로부터 약간의 치유와 자유로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철학가인 고 김진영 교수의 이 책이 특별한 것은, 이별을 감정의 영역에만 제한하지 않고, 철학적 사유로, 인문학적 바탕을 둔 여러 인용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함과 깊이를 함께 선물한다는 것이다. 선물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 상처와 고통의 원인과 근본이 누군가에 의해 이해받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별을 당당하게 마주하며 위로를 얻고 싶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특히 오랜 울림으로 남았던 몇 부분만 나의 느낌을 최소화하여 소개하려 한다.
추억은 하나의 세계다. 추억의 세계 안에 이별 이후의 너는 없다. 이별 이전의 너만이 그 안에 있다. 나는 그 과거의 시간을 꼭 껴안고, 그 안의 너를 꼭 붙든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 시간의 문을 닫는다. 아무도 입장시키지 않는다. 너마저도, 그 이후의 너마저도 나는 입장을 금지시킨다. 너만이 아니다. 나마저도, 지금의 나마저도 입장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추억의 시간 안에는 이전의 너와 나만이 있다. 지금 여기서 추억하는 나는 그 추억의 공간 외부에 있다. 추억을 할 때마다 외로운 건 그렇게 굳게 닫힌 추억의 문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추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나는 이 추억의 공간을 손수건으로 싼다. 그리고 슈베르트처럼 보리수 밑으로 간다. 혹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느릅나무 밑으로 간다.
학생들과의 이별이 일상이 된 나는 늘 이런 말을 한다. "추억은 현실과의 단절"이라고.
그리움으로 인해 추억에만 매달릴 수 없는 건, 지금 이 순간도 곧 추억으로 봉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 번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고 있을 때와 사랑이 끝났을 때. 그 사람 앞에서 흐르는 눈물과 그 사람의 부재 앞에서 흐르는 눈물. 그 사람 앞에서 울 때, 그 눈물은 기호다. 그 눈물 안에는 포즈가 있다: “보세요. 난 지금 이렇게 울고 있잖아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나빠요……” 사랑의 눈물은 갈 곳이 있다. 흘러서 그 사람에게로 도착하고 그러면 멈춘다. 그 사람이 같이 울어주거나 나를 안아주니까: “미안해요. 나를 용서해요. 이제 다시 아프게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눈물은 당신이 떠난 뒤에도 흐른다. 이때 눈물은 느닷없이 흐른다. 니체가 말하는 ‘때 없음(das Unzeitgemaesse)’의 사건처럼. 이 눈물에는 기호도 포즈도 없다. 보여줄 사람도, 보아줄 사람도 없으므로 도착할 곳이 없다. 그래서 부재의 눈물은 멈출 수가 없다. 흐르고 또 흐르기만 하다가 결국, 하회의 물길처럼,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고인다. 눈물을 흘릴수록 나는 비워지는 게 아니라 자꾸만 차올라서 마침내 눈물의 수조가 된다(“대동강은 언제나 마를까, 이렇게 나날이 눈물이 더하니”). 눈물은 더 흐르고 수조는 넘치고 나는 뗏목이 되어 넘쳐서 흐르는 눈물의 물길을 정처 없이 떠내려간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그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곳으로……
그래서 이별 후의 눈물은 그렇게 힘겨우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러나 그 눈물이 이별을 추억으로 봉인하는 과정임을... 완벽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도 알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과정임을... 정말 사랑했다는 증거였다는 위로 외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멈추거나 눈물을 덜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별이 너무 힘들었어. 아프고 밉고 싫었어. 그 사람을 잊어도 좋으니까 제발 이별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원했어. 그러면서 늘 이별과 함께 있었어. 잠에서 깨어나면 이별이 내 곁에 함께 누워 있곤 했어. 나는 이별을 아파하는데 이별은 그런 나를 아파하는 것 같았어. 나를 위안해 주는 것 같았어. 마치 자기만은 나를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결코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러다보니 이별과 함께 사는 일이 편해졌어. 그사이에 이별과 정이 든 걸까? 이제는 이별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이별이 끝나면 몹시 아플 것 같아.”
사랑과는 이별을 해도 이별과는 이별할 수 없는 걸까?
칼 하인츠 보러: 이별은 존재의 원풍경이다. 우리는 이별과 더불어 태어나서 이별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별이 필연이라면 그냥 동반자로 인정하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이별 아닌 다른 아픔과 고통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의 애씀과 노력으로 이별을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이니...
아픔
“보고 싶어서 미안해요”
사랑은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하지만 어떡해야 그 사람을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그 사람이 원하는 그대로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떡해야 그 사람이 원하는 그대로 다 해줄 수 있을까. 그건 나의 에고를 완전히 버리는 일이다. 에고를 조금이라도 남겨 가지면, 나는 그 사람을 아프게 하고 만다. 에고는 항상 자기를 주장하니까. 그 주장과 맞지 않으면 안 돼, 라고 말하는 게 에고이니까. 사랑은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다—이 말은 사랑은 에고를 모조리 폐기시키는 일이다, 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나는 당신을 조금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나의 에고를 다 버리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런데 이별 뒤에 그 사람이 나에게 원하는 건 뭘까. 그건 사랑이 끝났으니 더는 자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요청이다. 나를 생각하지 말아요, 나를 그리워하지 말아요, 나를 잊어버려요,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이것이에요. 그 사람이 원하는 것, 그건 자기를 더는 원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그 사람이 원하니까, 그 사람을 더는 원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생각하고, 보고 싶어 하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아무리 애써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는 이별의 주체가 되는 걸 그만둘 수가 없다. 나를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망각의 주체로 바꿀 수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아픈 마음으로 그만 혼자 중얼거리고 만다.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그런데 보고 싶어서 너무 미안해요, 라고
이별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아픈 게 당연하지만, 이 글은 유독 더 가슴이 아팠다. 보고 싶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일인가? 상식과 계산 값을 훌쩍 넘어설 정도의 큰 사랑을 했던 탓이다. 우리는 아픈 이별의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한다.
결핍
“나는 당신의 부재 앞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어요”
이별 뒤에는 목소리가 들린다. 괴로워하는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은 내게 충고한다.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 사람은 이미 떠난 사람이라고, 그러니 다 잊으라고. 또 겁을 주려는 것처럼 무서운 소문을 전하기도 한다. 당신이 이미 다른 사랑을 시작했다고, 나 같은 건 벌써 다 잊었다고…… 하지만 나를 이별과 이별하게 하려는 목소리가 타인의 목소리만은 아니다. 그건 나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너무 그리우면, 그래서 있을 수 없는 재회를 상상해 보면,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쓸데없는 상상이야. 그 사람은 떠나고 없어. 돌아오지 않아. 그러니 이제는 다 끝났어……
하지만 부재의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부재. 당신이 떠났으므로, 당신이 더는 내 곁에 없으므로 남겨지는 공백이 있다. 마치 내 서가에 있던 한 권의 책을 누군가 가져가면 그 책이 남기는 텅 빈 자리처럼. 이 경우 당신의 부재는 다만 ‘없음’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부재가 있다. 당신을 여전히 욕망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여전히 애착하기 때문에 나에게 존재하는 부재. 이 부재는 당신의 없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주관적이며 상상적인 부재이다. 나의 욕망과 애착이 만들어놓은, 그러나 채울 수 없으므로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결핍(Desiderat)으로 존재하는 부재. 그러므로 당신이 떠났다는 객관적 사실은 이 결핍의 부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름 아닌 그 결핍이 내가 당신에게 애착하는 상상의 부재를 만들어내니까. 마찬가지로 여전히 당신이 내 곁에 있다 해도 당신은 나에게 부재하지 않고 그냥 없음일 수 있다. 내가 더는 당신을 욕망하지 않으면, 당신은 나에게 결핍으로 부재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있지만 그러나 없음이니까.
없음은 있음의 반대말이 아니다. 없음은 있음과 무관함이다. 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 영화 속에서 출몰하는 얼굴들, 광고 속의 여자들, 신문 안의 정치가들—그들은 내게 있지만 그러나 없다. 보고 보이지만 그러나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다만 덧없고 무의미한 익명의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보는 것만을 본다’라는 베냐민의 말은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만을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앞에 있지만, 나를 보지도 않고, 또 내가 보지도 않는 것들은 내게 있으면서도 사실은 없다. 그것들은 내게 부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내게 없음일 뿐이다.
하지만 부재는 다르다. 부재는 있음과 떨어질 수 없도록 매어 있는 없음이다. 이 부재 안에서 당신의 없음은 샴쌍둥이처럼 당신의 있음과 묶여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부재하지만 그 ‘부재 속에서 있다’. 그리하여 내가 너무 아파하면서도 이별을 끝내지 못하는 건 당신의 없음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당신의 ‘부재’ 때문이다. 부재 속에 당신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의 없음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부재는 유령이다. 없지만 있는 것, 있지만 없는 것. 사실과 비사실의 사이.
그 사이는 위험한 사이다. 나는 자주 그 사이로 굴러떨어진다. 어느 날, 어느 거리, 어느 장소, 어느 물건, 어느 소리 앞에서 당신의 부재는 갑자기 눈을 뜨고 나를 습격한다. 차가운 시선으로 메서처럼 나를 찌른다. 뚜껑 열린 맨홀처럼 발밑에서 땅이 꺼지고 나는 그 캄캄한 부재 속으로 추락한다. 겨우 무사하던 일상은 허물어지고, 허물어져 열린 그 부재의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그동안 부재 위에 간신히 덮여 있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는 걸. 그럭저럭 무사하던 일상은 분화구 위에서의 평온이었다는 걸. 당신 없이는 그 어떤 무사함과 안전함도 음험한 위험일 뿐이라는 걸.
하지만 그 사이는 나의 안전지대다. 나는 그 부재 안에 집을 짓고 산다. 물론 나는 잘 안다.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명함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 느껴지지도, 붙잡히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당신이 없다’라는 사실은 나에게 승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부재를 껴안고 산다. 부재는 친숙한 일상이 된다. 실재라고 외쳐대는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들로부터 나를 숨길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도피처가 된다. 그렇게 부재가 부재해서 안전지대가 된다. 그 안에서 나는 잘 살아간다. 체포당했지만 하나도 문제없이 일상을 잘 살아가는 카프카의 요제프 K처럼.
그런데 이 부재가 이별 때문에만 존재하는 걸까? 당신의 부재가 전에는 없었던 걸까?
돌아보면, 당신은 내 곁에 있으면서도 또 늘 결핍으로 부재했다. 당신은 한 번도 나에게 온전하게 실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늘 그 어떤 결핍과 더불어 나에게 존재했었다. 그래서 나는 늘 목이 말랐다. 온전히 가질 수 없는 당신, 꼭 안으면 안을수록 빠져나가던 당신의 일부. 그 일부가, 그 결핍의 부재가 나를 매번 당신을 향해 애태우며 타오르게 했었다. 그 타오름이 나의 갈망이었고 애착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부재하지 않았다면 나의 사랑도 그처럼 뜨거울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또 나는, 무슨 이유로 다 소용없어, 라고 말하는 걸까. 어차피 나의 욕망과 사랑은 당신의 부재 앞에서 타올랐던 것인데…… 왜 나는 지금, 당신의 부재 앞에서, 다시 뜨겁게 타오르면 안 된다는 말인가? 왜 내가 당신의 뜨거운 부재와 차갑게 이별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과는 이별하지 않는다. 만난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만남 자체가 상관있는 관계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상관있어지는 순간 로맨스 뿐 아니라 그 어떤 만남과 관계에서도 아픔이 따른다. compassion의 어원은 "com(함께) + passion(고통)"이다.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뉴스에서 보는 사건, 사고 소식은 가슴 아프지만 고통을 함께 하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추석 명절에 들려온 졸업한 제자의 교통사고 사망 뉴스는 내게 안타까움을 넘어선 극심한 고통이었다. 상관있다는 건 그런 의미이고 그럴 경우에만 이별이 아프다.
교육현장에서는 학생들과의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하는 교사들이 있다. 어차피 교사들에게는 늘 시한부 만남이 주어져서, 유지한 거리만큼 떠나보내는 것이 힘들지 않을 것이니 그 선택을 존중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난 여전히 힘든 선택을 한다.
"당신이 함께 있을 때도 늘 결핍으로 부재했다"는 작가의 통찰이 놀랍다. 그 결핍의 부재로 더 큰 사랑을 이어왔다는 해석은 매순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다 채워주려 억지로 노력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함께 있을 때 그 결핍의 부재로 더 깊이 사랑했는데, 상대가 떠난 이후 당연히 있을 결핍의 부재로 느끼는 사랑을 왜 멈추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논리는 묘하게 설득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여서, 잊어야만 한다는 이별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