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효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

by 청블리쌤


<사랑하지 않으면 아프다>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제목에 끌려서 봤는데 알고 보니 뇌과학 책이었다.

<뇌가 사랑 없는 행위를 인식할 때 우리에게 생기는 일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첫 부분부터 교육적 의미를 찾아낸 즐거움으로 완독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정리하고 싶어졌다.

교육의 효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를 뇌과학적 관점으로 찾아냈다는 설렘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우리 몸에는 자가 치유력이 있다고 한다. 급성 통증이나 웬만한 몸의 불편함은 자고 나거나 시간이 지나면 치료 없이도 괜찮아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치료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믿기는가?

알코올을 해독하는 자가 치유력이 발휘될 기회를 주지 않고 간을 망가뜨리게 되는 이유나, 우리 몸을 혹사하게 되는 이유를 작가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밤이나 낮이나 의자에 앉아 모니터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제일 먼저 척추가, 그중에서도 등과 목의 근육 조직이 그 문제를 알아차린다. 각 기관은 뇌에 이상을 알리는 신호를 보낸다. 정상적이라면 고통을 인지한 몸의 주인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등을 이완해서 근육 조직에 가해진 긴장을 풀어주려 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의 신호를 흘려듣도록 배워왔다. 그래서 계속 자리에 앉아 지금껏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떠안게 된 등 근육은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 뼈는 더 굳고 근막은 달라붙어 척추 관절은 더 큰 곤경에 빠진다. 염증과 상처가 빈발하면서 뼈 구조가 변하고 돌출과 유착이 생긴다. 그 결과 척추 전체가 비틀려서 구부정하고 뻣뻣해진다. 그러는 동안 계속 가해지는 압력에 시달리던 폐도 자구책을 찾아 나선다. 이런 식으로 문제는 더 이상 생길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고통의 신호를 흘려듣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간에 쉬면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작업을 하거나 게임을 하라는 너무도 당연한 조언을 우리가 모르는 바도 아닌데, 그걸 머리로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통이나 위험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는 의미다. 고통의 신호를 무시하는 것이 의도적으로 쉬면서 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이미 우리가 몸으로 납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우리 인간은 동식물과는 달리 본연의 자가 치유력을 억제하고 무력화할 수 있다. 그 책임은 사는 동안 계속 달라질 수 있는, 즉 학습 가능한 뇌에 있다. 뇌는 자기 삶과 타인과의 공존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런 구상 중 어떤 것은 우리 몸이 자가 치유력을 발휘하는 데 유익하지만, 다른 어떤 것은 유익하지 않다.

신경생물학자들이 그동안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발달 초기 단계에 몸에서 뇌로 전달되는 신호 패턴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구조화한다. 즉 뇌의 오래되고 깊은 영역에서 시냅스 회로 패턴이 구성되는 방향은 그 사람의 체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출생 전부터 유년기 초반에 걸쳐 형성되는 두뇌의 이 영역은, 몸에서 일어나는 온갖 과정이 서로 통합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우리가 몸을 움직일 때, 노래하고 춤추고 말할 때 필요한 운동 기능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도 이 영역의 역할이다.

이 기본 바탕 위에 아이가 외부 세계, 특히 보호자와의 관계에서 쌓은 경험이 더해져 뇌 신경 회로 패턴이 구성된다. 이는 성숙한 뇌 구조를 이루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이때부터 아이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 그중에서도 보호자와의 관계 형성을 뇌 발달상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섭하지 않아도 뇌는 알아서 에너지 소비를 가능한 한 낮게 유지하도록 작동한다. 그중 가장 흥미롭고 효과적인 전략은, 뇌 기능의 원리이기도 한 ‘단순화’ 작업이다. 이는 우리 몸의 다양한 행동과 반응을 조화롭게 제어하기 위해 상위 패턴을 형성하고 자동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개념이다.



이미 학습된 과정을 자동으로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뇌는 익숙한 자극대로 반응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에는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뇌는 의외로 게으르다는 것을 여러 책을 통해서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오히려 그 게르임이 우리의 행동 패턴의 효율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걷는 동작을 의식적으로 반응하며 에너지를 쓸 이유는 없다. 그렇게 아낀 에너지는 가용자원처럼 다른 작업을 할 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니 정말 유용한 시스템이다.


그런데 무엇을 자동화하면서 에너지를 절약하는가 하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르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래 설명을 보자.



전두엽에 복잡한 망 형태로 새겨진 이 사고방식과 태도는 그 사람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어떤 걸 신경 쓰고 어떤 걸 소홀히 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무관심하게 여기는지를 결정한다. 이 기능은 거의 자동화되어서 매 상황 어떤 행동이 적절하고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를 줄인다.


모든 일을 고민하며 혼란스러워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패턴에 맞게 익숙함의 정도와 자동화의 정도가 다 달라진다.

그런데 그게 신체의 동작이나 행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발견의 기쁨, 개방성, 창조의 즐거움도 자동화 목록에 포함된다. 부러움, 인색함, 원망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각과 지적 활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해지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우리가 특정 기억이나 생각을 떠올리면 저절로 그와 연관된 감정과 신체 반응이 따라올 때가 있다. ‘체감한’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지금까지 해온 경험의 정수 혹은 축적을 우리는 대중적 용어로 사고방식 혹은 태도라고 풀어쓴다. 신경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전전두엽 피질에 저장된 주관적 경험의 ‘메타표상Metarepresentation(어떤 표상을 이해하기 위한 이차적 정보로, 경험이나 외부의 지식으로 획득됨)’이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태도는 어떤 사건을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결정적 잣대가 되어 우리 앞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불안과 스트레스로 반응할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한다.

...

한 사람의 전전두엽 피질에 새겨진 태도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이미 감정 및 신체적 반응과도 연동되었기에 정서적 부분들이 동시에 활성화되지 않는 한 교육, 지도, 설명 등 단순한 인지적 개입만으로는 지속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애정, 동정, 배려 등의 정서적 개입만으로도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번 설정된 태도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새로이 다른 경험을 하는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경험을 할 의향이 있는지, 그래서 자가 치유력을 다시금 회복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그 사람의 내적 태도에 달렸다.



태도는 “한 사람이 지금까지 해온 경험의 정수 혹은 축적”을 뜻하며, 그 태도는 체감한 경험들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 태도는 감정 및 신체 반응 등의 정서적 부분들이 동시에 활성화되지 않으면, 인지적인 가르침이나 교육만으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뇌에 새겨진 축적된 경험치로 인해 뭔가를 머리로 이해하고 알게 되더라도 그냥 거기서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특별한 자극이나 동기유발의 기회를 가지게 되어도 그게 지속되지 않은 것은 그 축적된 경험치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습관형성도 한두 번의 시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는 그리고 그 변화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한다. 머리로서가 아니라 체감하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본능적으로 익숙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뇌의 디폴트 설정(기본값)이 아니다. 익숙한 대로 유지하려는 속성이 본능에 가깝다.

그래서 지속성 여부를 떠나서 애초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는 자세부터가 놀라운 출발점인 것이다.


일단 변화에 대한 유연한 자세만 가질 수 있다면, 그다음 교육자로서 해야 할 역할은 그 변화의 결과가 한 번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수없이 좌절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목표했던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음에 대해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강압적인 느낌의 압박을 느끼지 않도록 믿어주며 기다리는 일이다.


결국 자가 치유력도 스스로 발휘되어야 하는 일이고, 그런 변화를 삶으로 이루어가는 것도 본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급하고 욕심이 나도 교사나 부모라고 해서 원하는 교육적 변화를 바로 확인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아이들의 진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경험의 축적이 교육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해서 교사가 수업설계를 변화된 행동 패턴에 초점을 맞춰서 억지로 끌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이끌면 안 될 것 같다. 자연스럽게 목표하는 변화가 서서히 일어날 수 있게, 오히려 수업시간에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일상에서, 이후의 학생들의 삶에서 생겨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삶으로 드러나는 교육의 효과는 눈으로 확인하려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학생 혼자서 뭐든 체험하고 체감할 수 있는 기본능력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을 직접 축적하면서 변화를 이뤄가면 좋겠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므로 독서를 통한 간접체험을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이왕 학생들이 생각을 통해 더 성장하려면 잠시 멈춰서 쓰기의 기회를 갖도록 해주면 좋을 것 같다. 독서만으로도 새로운 변화에 대한 새로운 옵션을 확인할 수 있지만, 문턱을 넘으려는 실행은 그 옵션을 구체화해서 잠시 멈춰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쓰기의 기회다.


읽으면서 생각을 키우는 자발적 쓰기가 가능한 플랫폼과 기회를 충분히 만들어 주는 것도 어른들의 역할이 되면 좋겠다.


결국 진짜 교육은 삶을 관통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교사는 수업기획부터 학습코칭과 학생상담 등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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