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후 아침 영어수업의 기억(2003)

by 청블리쌤

고3 담임할 때 가장 힘든 시기가 수능 이후다. 아이들은 갑자기 삶의 목적조차 잃은 아이들처럼 학교를 오는 것조차 고민한다. 수능 후에 학교 가는 차비가 아깝다고 한 학생도 있었다.

수능과 입시만을 위해 달려왔는데... 수능이 끝나고 나니까... 학교에서 뭔가 더 가르치려고 해도 아이들은 전혀 들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아이들을 탓할 수는 없다. 수능만 끝나고 세웠던 거창한 계획도 정작 수능 끝나고는 의욕과 흥미를 잃는다. 내가 고3 애들한테 늘 하는 말 “수능 전엔 뉴스도 재미있지만, 끝나면 드라마도 재미없다.”

수능 전에 독서를 못하면 수능 끝나고 시간이 없어도 못한다. 결국 시간이 많고 적고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인간답기를 포기하기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수업이나 시스템이 훨씬 더 좋아졌을 거라고 기대하고 싶다.

아래글은 2003년 해두었던 메모를 재구성한 내용.




2003년 고3 담임할 때 수능 끝나고 무모한 도전을 했다. 매일 아침 등교 시간 1시간 전에 영어수업을 하려 했던 것이다. 수능 끝나고 수능시험 대비가 아닌,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진짜 영어공부를 돕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얼마나 호응할지가 관건이었다. 수강료는 열정페이였다.


독해나 회화나 영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 되어줄 활용문법을 정리해주고 싶어서 선택한 교재는 <Grammar in Use - Intermediate>


단 몇 명이 신청해도 그저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40명이 넘는 학생들이 신청을 했고, 30여 명이 꾸준히 수업을 들었고 한 달이 지나서까지 살아남은 학생들은 20명이 넘었다. 수능 끝난 고3들에게 아침 8시는 평소 새벽 5시나 6시에 학교 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 미션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밀어붙였었는데...

이 수업을 기획한 나보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더 대단했던 거고, 그래서 난 수업하는 내내 감동과 감격이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소문내고 하려는 일은 아니었는데 지나치다가 우연히 수업을 목격했던 교장쌤이 전체직원회 때 미담사례로 전 선생님들께 "대가 없이 베푸는 교육”만으로도 학생들이 삶을 배울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다음 해에도 부탁한다는 당부를 하셨다. (다음 해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해에 내가 용기를 내서 수업을 기획한 것은, 수업 자체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아이들 외에도 팬심만으로도 참여할 만한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해에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 차별이 아니라 슬픈 현실 인식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좋은 의도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지만 난 부끄러워서 자리에 엎드려 있으니까 친한 쌤들이 내게 와서 이랬다. “왜 그랬어요?” 이러니까 주변 선생님들은 그 쌤들한테 “쌤은 뭐하고 계세요?” 이렇게 농담식으로 말을 건넸다. 그 상황은 내게 너무 불편했다. 소문내서 칭찬받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공식적으로 내부기안도 없이 조용히 진행했는데, 들켜버려 벌받는 느낌까지 들었다.


어떤 쌤은 수강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가 산 책 더 잘 보고, 자기 돈 내고 듣는 수업에 더 열중한다는 논리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수업만큼은 아니었다. 수강료 이상의 대가를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아이들의 달콤한 아침잠과 귀중한 시간이었다.


어떤 쌤들은 나보고 대단하다고 말씀하셔서 난 이랬다. “애들이 더 대단하죠. 수능 끝나고 8시 수업에 오다니”


이런 소동을 겪고 나서 수업받는 아이들에게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느낌을 잔소리를 더 얹어서 이렇게 전달했다.


서울 법대에 진학해서 과수석을 하고 있는 제자는 수능 후 토익 새벽반을 들었었다.

이 수업 과정을 통해서 영어 외에도 그런 자세와 삶에 대한 준비 과정을 배우고 훈련할 기회가 되면 좋겠다.

성공하려면 성공할 생각을 해야 한다. 학교나 주변 건물이 있는 건, 우리가 이렇게 수업을 하는 건, 누군가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실체가 된 것이지.

사랑받으려면 그런 생각, 성공하려면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 불평, 불만은 병든 생각이고 환경에 좌우되는 나약함이란다.

첫 단계로 생각하기를 방해하는 무작정 TV 켜 놓는 습관부터 버리길...

난 TV를 거의 안 본다. 요즘은 집에서 교재연구하고 독서하고 컴퓨터 작업을 한단다. 그러다가 온 가족이 드라마 <천국의 계단> 재방송에 푹 빠졌다. 세 살짜리 딸이 다음 예고편에서 TV를 끄니까 “야! 빨리 안 켜!”라고 소리를 질렀다. 예고편까지 다 끝나니까 “저거 언제 해?”라고 물었다.

TV는 봐야겠다는 의지가 따로 필요 없지. 그냥 켜놓기만 하면 그다음은 TV가 주도하게 되니 주도권을 빼앗긴 삶이 될 수 있는 거다. 무조건적 배척하라는 건 아니지만, 더 가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 주에 우리집 TV를 끊어 버렸단다. 가족 시간이 늘어나더라. 식사하면서 대화가 가능해졌고, 딸과 같이 노래도 하고, 와이프랑 컴퓨터도 하고, 10시 넘어서 드라마 할 시간에 셋이 자리 펴고 누워서 독서 삼매경에 빠졌단다. 지속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차이겠지.


여러분들은 부디 생각이 바뀌길.. 삶을 주도하길.. 순간순간 시간을 소중히.. 어떤 길을 가든..




그리고 수업 마칠 때 전체 학생들에게 전달했던 편지글 링크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1059072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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