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아나토미를 보고
<그레이 아나토미>는 내 최애 미드 중 하나다. 올해로써 벌써 19시즌을 앞두고 있다.
처음에는 의학 드라마를 가장한 막장 연애 드라마라고 생각할 정도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 문화와 나의 삶에서 그들의 연애 스토리를 분리하여 볼 수 있을 때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삶과 죽음, 회복과 치유를 통해 난 삶을 배우고 있었다.
18년째 이어지고 있으니 드라마 속 인물과 나는 진짜 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미드 <프렌즈>가 10년 만에 종영을 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는데, 이 드라마는 정말 끝도 없이 함께 세월의 흐름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극중 회상 장면은 극중 인물의 추억뿐 아니라 그걸 지켜보고 함께 감정을 공유하며 감정이입했던 나의 추억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작년까지는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22년 9월 현재 디즈니+에서만 볼 수 있다.
19시즌은 22년 10월에 시작되며, 디즈니에 이미 방영된 18시즌까지 다 올라와 있다.)
16시즌은 코로나로 인해 갑작스럽게 2020년 4월 29일에 조기종영했다.
그리고 17시즌에서는 본격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을 그대로 다루고 있다.
시리즈 전체에 걸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다루다 보니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가 곳곳에 담겼는데, 17시즌은 코로나로 인한 비극과 슬픔이 베이스로 깔려 있어서 무거운 마음으로 보고 있다.
팬데믹 상황에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고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갑작스러움이 더 큰 비극으로 다가온다. 암을 진단받고도 잘 치료를 받아 살아남는 경우도 있는데, 어제까지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사망할 수도 있는 것이 코로나 팬데믹의 비극적 현실인 것이니까...
정주행하다가 시즌 17의 에피소드 12에 나오는 한 대목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코로나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한 코로나 진단 환자가 간곡한 치료 권유를 거절하고 병원 밖을 나서자마자 사망한 장면 뒤에 자신의 말만 들었으면 생존할 수도 있었던 안타까움을 담아 닥터 베일리는 동료 의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Most people never feel what it’s like to be really great at something, but we do, right? I do. I can put broken people together with needles and string. But I can’t fix this. I mean, how do I treat someone who is offered help and chooses to walk away? I want to hope, I want to believe that, you know, just a little longer and we’ll be over this brutal hill.
어떤 분야에서 정말 뛰어난 것이 어떤 건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잖아? 난 확실히 알고 있거든. 난 다친 사람들을 바늘과 실로 고쳐줄 수 있다고. 그렇지만 이런 경우엔 고칠 수가 없어. 내 말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냥 가버리는 사람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냐고? 난 희망하길 원하고 믿기를 원해...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가 이 잔인한 언덕(코로나 팬데믹)을 넘어설 거라는걸...
치료할 수 있는 환자가 치료 자체를 거부한다면... 아무리 설득하고 강권해도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의사에게 치료할 능력이 있거나, 환자가 치유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의사도 실수를 하고, 과잉진료로 치료의 본질을 벗어나는 의사들도 분명히 있지만...
이 대목에 특히 더 공감이 간 것은 교육현장에서도 이런 신뢰의 문제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난 수많은 경험치와 축적된 데이터로 확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메시지나 학습방향을 전하고 수업을 진행하는데... 학생들로부터 거부당할 때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닌데,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배움의 의지가 없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의사들이 요즘에는 인터넷 검색으로 무장한 환자를 만나야 하는 것처럼, 교사들은 사교육을 더 신뢰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 치료를 시작하거나 교육이 시작되어도 치유와 성장의 간절함과 의지에 따라 성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음도 의사와 교사가 넘어서야 할 벽이다. 아니 치유와 교육적 성장은 결국 환자와 학생 본인이 이루는 것이니, 벽을 넘는 것도 그들 자신일 것이다.
믿고 따라오면 분명히 될 수 있는 일임에도 망설이거나 대놓고 거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직 때가 아니거나, 꼭 나를 통해서만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니, 믿으며 기다려 보려 하지만.... 너무 안타깝고 아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내가 할 수 없다니...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