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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업평가를 계속 받는 이유

by 청블리쌤

그동안 수업평가받은 것 중 재미있는 것 몇 가지만 뽑아보았다.


* 말은 빠른데 진도는 느리다.

아이러니하다. 말이 빠른데 진도는 느리다니. 학생 입장에서는 최악이다. 말은 빨라서 잘 못 알아듣는데, 진도는 답답하다는 것이니...


* 말을 느리게, 키는 좀 더 크면 좋겠다

말이 빠르다는 걸 내 키와 결부시키다니. 이미 말을 느리게 하는 건, 키가 좀 더 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체념의 표현일 수도.


* 래펀줄

말이 빠르다는 걸 다 짧고 임팩트 있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 생각했다. 래퍼라니...


* 평소에 들으면 멋진 목소리지만 수업시간에 들으면 어쩜 그리 자장가인가

칭찬으로 시작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화술이 뛰어난 학생이다. 자신이 수업시간에 잠을 잘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이유까지 얘기하고 있다.


* 목소리가 밤에 잠 잘 오는 라디오 DJ 톤이에요

칭찬과 비판이 섞여 있다. 문제는 이게 수업 평가라는 것이다.


* 애써 칠판 높은 곳에 글씨 안 쓰셔도 되어요.

안타까운 마음을 굳이 표현했다. 너무 애써도 안 되는 것들에 대해 받아들이라는 인생 교훈까지 학생으로부터 배운다. 어느 순간부터 손가락 지시봉이 내 수업 시간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지시봉이 있으니 키의 제약 없이 TV화면의 높은 곳까지 가리킬 수 있게 되었다. 한계가 있으면 일단 받아들이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정철 작가가 그랬다. 키가 작아서 닿지 않으면 손을 뻗으면 된다고. 그게 간절함이라고.


* 자꾸 뭘 공부 안 해도 된다 한다

학원에서는 뭔가를 많이 배운다. 그리고 그런 배움의 느낌은 안정감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끝없이 많이 쏟아져 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배우기도 한다. 특히 영어 문법이 그렇다.

난 암기가 아닌 이해의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는 지식의 핵심체계를 정돈하여 제시한다. 가지치기를 해서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한다. 예외적인 것, 자주 나오지 않는 것까지 완벽하게 커버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그런 예외적인 것은 기본부터 하다 보면 어쩌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부터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우선순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영어문법은 정말 쓸데없는 걸 많이 배우고 있기는 하다.


* 설레는 문장 발음해 줄 때 심장 폭발

여고생들의 감성이 담긴 표현... 이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학생에게 문제가 있다. 나의 별거 아닌 것에 폭발하는 그 감성을 어쩔 것인가?


* 너무 집중하다 보니 그다음 시간이 졸리다

그렇다면 다음 교과선생님께 미안하긴 하다. 고등학교 있을때는 나보다 늦게 수업시간에 들어오거나 그제서야 책을 가지러 가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종 치면 바로 들어가는 게 또 함정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작 종이 치기 전부터 움직여야 한다. 애들이 제발 종 치고 좀 더 있다 들어오라고 성토를 하기도 할 정도다. 그런데 그런 긴장감이 아이들의 집중도를 높이기는 한다.


* 문법 깊게 들어가실 때 경이의 눈빛으로 쳐다보게 돼요.

극찬의 평가라서 뽑아보았다. 경이의 눈빛이라니 ㅋㅋ 보통은 없어 보일 정도로 기본기에 관한 것을 정리하지만, 때로는 세밀한 어감과 활용이 가능한 거라면 더 깊이 있는 것도 다뤄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그런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도 좋은 반응을 많이 보여줬다.


* 수업에 열정! 한 번도 수업이 허술하거나 준비가 미비했던 적이 없다.

맞는 말이다. 수업시간에 농담조차 기획하여 드립처럼 포함시킨다. 딱 시간에 맞는 수업준비가 아니라 넘치도록 준비해서 찔끔 전해주는 것이 내 목표다.


* 영어시간이 무서워 보긴 첨이다. 너너테스트 때문인 것 같다.

너너테스트는 수업 시작하자마자 무작위로 지적해서 구두로 하는 단어테스트를 말한다. 지적할 때 이름은 알고 있지만,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너! 너!"라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아이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통과했을 때는 100점 맞은 것처럼 기뻐하기도 했다.


* 단어를 한 번씩 실수하고는 페이크라고 우긴다.

초임 시절 대구고에서 받은 설문의 내용이다. 남학생들은 그냥 우겨도 잘 통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슬픈 첫사랑을 가진 사람

첫사랑은 누구의 것이든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대개 슬픈 결말을 가지고 있고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련하게 기억에 남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가면서 그런 것인지, 내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인지 갈수록 아이들은 내 첫사랑 얘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 작은 고추가 맵다 그러나 교장에게는 약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키가 작다는 것까지...


*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힌 것 우리에게 다 푼다

초임 시절 이야기다.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할 따름이다.


* 무조건 수업이 아니라 샘과 제자가 하나 되는 수업, 웃으며 하는 수업

학생들과의 교감이 잘 이루어지는 수업에 대한 기분 좋은 평가였다. 초임 시절 남고에서의 평가다. 이후에는 무조건 수업만 하는 일이 많아서 좀 찔린다.


* 선생님 평가하라는 선생님 태도가 마음에 듦

어떤 애들은 굳이 이런 걸 왜 하느냐고 귀찮아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하거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반기는 애들이 많았다. 익명을 보장하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어떤 애들은 혹 내가 필적 대조하여 찾아낼까 봐 왼손으로 적기도 하였다.


* 선생님은 왜 그렇게 스스로 아픔을 자처하시나요. 다른 쌤들은 이런 거 안 하시는데.

평가를 받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읽는다. 아이들의 공감대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대개는 아이들이 많이 웃는다.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미있고 재치 있는 표현들도 많았다. 물론 선을 넘는 얘기도 있는데 웬만하면 다 읽어준다. 아이들은 그건 너무했다는 숙연해진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떤 아이들 관점에서는 내가 너무 아파 보였던 거다. 그렇게 공감해 주는 아이들이 있으니 고마웠다.



<의외로 좋은 평가 모음>

• 보통 수업과는 다른 방법으로 흥미를 갖게 해 준다. 알기 쉽게 설명하여 이해시킨다.

• 정말 재미있고 유명 학원에서 듣는 것보다 더 잘 가르친다. 진짜 영어를 가르쳐준다.

• 어디서도 듣지 못한 수업이다. 기초가 없어도 이해가 잘 되고 학원 갈 필요 없다.

• 영어 가르치는 데 열심이며 학생들을 모두 아껴준다.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소통한다.

• 인생에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해준다 – 감동, 눈물, 교훈, 웃음

• 상담을 잘 해준다. 잘 들어준다.

•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하여 포기하지 않게 해준다. 공부동기유발을 시켜준다.

• 삶 자체를 닮고 싶다. 신뢰와 믿음을 준다. 늘 노력한다.


학생들의 수업평가가 다 솔직하지는 않다. 익명이라도 팬심이나 과장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믿으면 안 되지만, 마음에 안 든다는 학생들의 말에 상처도 받지만, 굳이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이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교사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소통의 기회, 삶으로 만나려는 노력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말의 구속력의 힘을 빌려 매년, 혹은 매 학기 껍질 깨고 나올 용기와 아이들이 바라는 교사상이 되기로 다짐할 확실한 계기가 된다.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표현할 기회라는 것이 내가 상처받을 기회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상처를 자처한다. 때로는 칭찬과 격려 같은 느낌으로 힘을 얻기도 하고, 부족한 모습을 돌아보며 노력하게 된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수업평가를 받아야 내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나는 성장을 거듭했다. 물론 이상적인 위치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 와중에 정말 힘이 되었던 수업평가 하나


* 익명을 이용해서 심한 말 하는 학생들보다 선생님 좋아하는 학생이 더 많아요.

사실 여부를떠나서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내 개인적으로 실시하는 수업평가 기간에 복도를 지나가면 내게 힘내라는 말을 수줍게 전하기도 했다.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대다수의 좋은 일보다 한두 가지의 안 좋은 일에 더 집중한다. 백지 위에 점이 있으면 더 넓은 백지보다 점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처럼...


학생들은 내게 병도 주고 약도 주고 있었다.


- 팁 하나 : 수업 중 익명으로 작성하더라도 누가 썼는지 알아내는 방법이 있다. 맨 뒤 사람이 순서대로 걷어 오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학생들이 단 한 번도 지시에 따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순서를 섞는 열정만 불러 일으켰다. 나도 누가 썼는지 확인할 마음은 없었다.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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