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름에 진심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 만남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생물의 종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창조적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물고기에 이름을 붙이는 일에 모든 걸 다 바쳤다. 새로운 종의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열정도 대단했지만, 더 놀라운 건 천재지변으로 인해 그가 유리병에 박제해두었던 물고기의 표본이 다 깨져버렸을 때, 즉 거의 평생 연구와 노력이 무너져내렸을 때, 포기하지 않고 복구하려는 그의 포기를 모르는 집요함과 끈기였다.
그리고 그런 속성을 저자는 단어로 이름 붙이듯 이렇게 규정한다.
Grit. 끈질김을 뜻하지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그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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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의 속성과도 들어맞는다. 보통은 타고난 기질의 비중을 두지만, 후천적으로도 훈련을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한다.
어쨌든 여기까지 보면 주인공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영웅담을 소개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자기 원칙을 고수한다는 건, 그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을 때는 멋진 일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재앙 같은 일이라는 것이라는 걸 책을 끝까지 보면 깨닫게 된다.
원칙주의자... 이름을 붙이면서 뭔가를 규정하는 행위는, 사다리 같은 위계의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이어지면서,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만심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일수록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인다.
우월성에 대한 생각은 생각보다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교육현장에서는 학습능력과 성적에 따른 우월성으로 줄을 세우는 걸 당연시한다. 혹 공부 외의 다른 요소나 능력이 대입전형에 개입된다면 공정성 논란이 거세질 것이다.
생물종에 대한 인식도 일정한 기준에서 줄을 세우는 느낌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혹 우월한 종에 대한 인식으로 그 종의 속성만 남겨둔다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며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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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세균cyanobacteria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바다에 사는 이 작은 초록 점 같은 생물은 인간의 눈에 너무나 하찮게 보여 수 세기 동안 우리에게는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조차 없었다. 1980년대 어느 날,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의 상당량을 이 남조세균들이 생산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 작은 초록 점들인 프로클로로코쿠스 마리누스Prochlorococcus marinus에게 경외심을 느끼고,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 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우생학은 실제로 존재했던 연구분야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삶을 구속하며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비인간적인 잔인한 실행으로 이어졌다. 특정한 생물의 종, 인종에 대한 우수성에 대한 교만한 생각은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대량 살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직까지 인종차별의 뿌리나 본질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게 행동으로 얼마나 더 적극적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내가 대학시절인 90년대 우리 대학의 한 교육학과 교수님은 수강 학생들에게 자녀를 셋 이상 낳을 것을 강권했다. 고등교육을 받는 지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의 자녀가 많아져야 나라의 부국강병을 실현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미국에서 1900년대 초반부터 범죄자나 열등하게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불임화가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는 것은 꽤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체와 인종을 사다리처럼 상하관계를 규정하며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이렇게 명확하게 주장한다.
가난과 고통과 범죄가 혈통의 문제이며 칼로 잘라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생물종의 최고 꼭대기에 있다고 여기는 인간이 과연 모든 면에서 가장 우월한 종인가에 대한 반박을 저자는 이렇게 인용한다.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 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큰 뇌를 갖고 있지도 않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힘이 세지도, 번식력이 가장 좋지도 않다. 같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한 적응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크건 작건, 깃털이 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그 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인간은 생각보다 위대하고 큰 존재가 아니다. 우월성을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겸허한 자세로 모든 생명체와 자연과 현실을 존중할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인정해야 우리 인간은 모두 각기 자신만의 모습으로 소중하고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다. 그게 저자가 강조하는 민들레 철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 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 저자의 주장대로 평소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할 삶의 태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꿈이나 희망까지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검토하며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세한 설명과 논거와 상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등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길... 여기서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
이 책은 장르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분명 과학도서인데 철학, 역사, 심리학, 사회학, 인문학적 에세이와 일상적인 이야기도 담겨 있다. 마치 동질성을 넘어선 개체와 종의 다양성과 개성을 얼버무려 그 중요성을 책 자체의 구성으로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책의 첫 부분에서 도대체 저자는 무슨 의도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계속 읽다보면 그 모든 이야기가 퍼즐처럼 맞춰지는 지적 쾌감은 물론 삶에 대한 통찰력도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실은 나도 첫부분만 보고 포기했었다가, 학교의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도전하여 완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좋은 책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