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연수할 때 어쩌다 보니 지거국(지방거점국립) 대학의 현재 위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연구사님께서 다소 충격을 받으셨는지 경북대가 국숭세단 라인밖에 안 되냐고 되물으셨다.
경북대 경영학과를 90년대 후반에 입학한 남동생은 그당시 중앙대와 차이가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경북대를 종합대학 문과 기준 정시 입시라인 <서연고 / 성서한 / 중경외시이 / 건동홍숙 / 국숭세단> 중 5번째 라인인 국숭세단 라인 정도로 잡는다. 물론 이과는 학과에 따라 서열이 많이 뒤섞이기도 하고, 경북대 이과는 학과에 따라 건동홍숙 라인 정도까지로도 볼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지거국 사범대의 입학라인이 지거국 내에서도 압도적으로 높았는데, 의대와 마찬가지로 사범대는 굳이 서울에 가서 취업하지 않고 지역에서 교사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딸을 멀리 보내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부모님들이 서연고 급의 학생들도 지거국 사범대를 진학시켜 집에 그냥 눌러 앉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IMF이후 안정직을 선호하는 현상 때문에 사범대와 교대의 인기가 높아지는 현상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학력인구 감소로 인한 교사수급의 불균형으로 매년 뽑는 교사 인원이 말도 안 되게 너무 적어져서 임용고사가 말 그대로 고시가 되면서 사대와 교대의 합격권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 학령인구는 계속 줄어들 것이니 마냥 좋아질 거라고 낙관적으로 바라보기도 어렵다.
어제 지방거점국립대인 경북대를 졸업하자마자 공기업 취업에 성공한 제자와 통화를 했다.
문과생으로서 취업전선에 있는 세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자의 얘기를 정리하면...
공기업과 사기업의 차이는 전공시험 유무다. 공기업을 대비하려면 보통 3년 이상은 준비해야 하니 대학 입학하자마자 공기업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여 미리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다. 사기업은 전공시험이 없어서 졸업반 때 고민하여 서류전형을 대비하면 1년 만에도 지원이 가능한데 공기업은 즉흥적으로 원서를 낼 수 없다. 공기업에 대한 의지가 뚜렷하다면 지거국은 어느 라인 이상이 아닌 인서울보다 훨씬 유리한 건 맞다.
지거국에는 성적이 넘쳐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 많이 진학을 한다.
경북대에 가서 공기업을 가게 될 것인지, 공기업을 준비하기 위해 경북대에 갈 것인지 명확한 방향이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라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전자의 경우는 방황하다가 결국 공기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으며, 그마저 준비가 여의치 않을 때 힘겨운 고민을 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 실시했던 블라인드 전형으로 지방대의 경우 불리함이 다소 줄었었는데, 이번 정권에서는 이미 블라인드가 폐지된 모집전형이 생기기 시작했고 점차 확대가 될 것으로 예상되니, 사기업 진출이 더 어려워질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거국은 물론 지방대 학생들이 공기업에 더 몰리고 있어 경쟁률을 더 올라가고, 공기업 전공시험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 점점 더 치열해 질 것 같다.
이 제자는 경북대 가기가 아까운 실력이었지만, 재수나 반수를 선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지역할당제로 공기업에 바로 취업을 했으니 성공한 케이스라고 축하를 받고 있긴 하지만 본인 생각은 좀 달랐다. 재수를 하든지 해서 인서울 대학을 다녔다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삶이 달라졌을 거고, 다양한 취업 분야의 가능성을 두고 고민하며 새로운 도전도 해봤을 텐데, 경북대 진학하면서 공기업 준비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을 얘기했다. 물론 다양한 고민 끝에 자신의 성향상 결국에는 공기업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얘기도 덧붙이긴 했다.
인터넷 댓글에서 무조건 인서울이라 생각하고 숭실대를 왔는데 경북대나 부산대를 가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를 본 적도 있으니, 꼭 그랬어야 했다는 선택의 정답은 없을 것 같다. 후회하는 그 학생은 이미 서울에서의 생활을 통해 문화적 인프라를 누리며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성장을 이루었을 것이니...
고민은 선택 전에 하는 것이고, 선택 후에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노력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니까.
어제 제자와 통화하면서 그 제자처럼 대학도, 취업한 지금 당장도 집에서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으니 좋겠다는 건, 부모만의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에게 둘째 딸을 만나서, 경북대가 얼마나 좋은대학인지,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롤 모델이 되어서 설득을 해 보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그러니까 그 제자는 일단 롤모델 기준 설정이 잘 못된 것 같다고 겸손해했고, 두 가지 모두 확신을 주는 이야기가 안 나올 것 같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문과생으로서 공기업을 가야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게 아니면 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내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고려대를 포기하고 독립하는 것보다 집에서 생활하는 안정을 선택하며 대구에 남은 제자도 있었다. 물론 대구에 남으면서 한 선택이 한의대였으니 안정감을 떠나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대구 학생들이 인서울을 꿈꾸는 건, 서울을 관광하러 가는 이벤트적 즐거움이 아니라 일상으로 누리고 싶다는 생각 외에도 부모의 물리적인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는 마음도 분명 있을 것이니까...
두 딸을 내 욕심으로 집에서 경북대를 다니도록 붙잡아 둘 수 없음을 다시 실감했다.
둘 다 수능을 적당히 망했으니 경북대 진학해서 그냥 집에서 딸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었지만 자의로든 타의로든 굳이 선택하지 않으려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의 행복이 우선이고, 자녀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건 부모의 의무이기도 한 거니까.
첫째 딸은 정시로 경북대를 보낼 수 있었는데, 논술로 수시납치(?)를 당해서 성균관대를 다니며 독립을 이뤘고..
(수시납치라고 하면 남들이 욕한다. 그런 납치라면 얼마든지 당하겠다면서... 경북대 다니게 되었다고 내심 좋아하고 있다가 수시추가합격하는 순간 딸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아쉬움이 있기는 했다ㅠㅠ)
친한 후배가 큰 딸 수시 합격 발표 전에 수능 망해서 정시로 경북대 갈 것 같다니까... 딸에게 이랬다. “너네 아빠는 죽어라고 재수해서 경북대 갔는데, 넌 망해서 경북대 가네ㅋㅋㅋ”
둘째 딸도 정시로 경북대를 갈 수 있지만 내가 제시하는 최소한의 인서울 라인 중경외시의 꿈을 이어가려 한다.
딸과 좀 더 오래 집에서 함께 지내고 싶고, 이왕이면 아빠처럼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아빠의 소원을 오히려 수능을 망쳤으니 못 이기는 척하며 들어 줄 법도 한데...
진정한 독립을 꿈꾸며, 교사도 공기업 준비도 원하지 않는 둘째 딸이 아빠와 다른 그런 꿈을 꾸는 것을, 그리고 comfort zone을 굳이 박차고 나가려는 그 도전을 그저 묵묵히 응원해 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