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학교 영어교사 연수를 앞두고
평생을 학교에만 머물렀다. 군휴직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학교를 떠난 적이 없었다. 학생과 교사의 신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피터팬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생각한다. 몸은 어른이지만 어른의 세계에 끼지 못하는 ‘어른아이’로 살아가는 느낌? 의도적으로 그래야만 학생들과 멀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에서이기도 하지만, 학창시절이 너무 좋아서 그냥 그 추억을 현실인 것처럼 판타지를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중학교 일기장에서 졸업이 다가오는 아쉬움을 세월의 무상함으로 한탄하며 슬퍼했던 대목을 보고... 그저 웃어넘길 수 없었던 건... 여전히 나이가 들어서도 그러고 있는 나의 모습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학생들을 어떻게 떠나보낼지 졸업이 다가오지 않았음에도...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류시화 시의 한 구절처럼 이미 떠나보내기 전부터 벌써 아쉽곤 했다.
대학시절 교사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다. 교생 때 만났던 학생들을 행여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까지 품어가면서... 교생 때 만났던 사대부고 학생들은 이후 내가 만나게 될 학생들의 막연함을 구체화시켜준 소중하고 고마운 학생들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난 그 떨림과 설렘에서 완치되지 못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불안한 상황에(왜 아버지가 중간에 군대를 다녀오지 못하게 하셨는지, 난 또 왜 그 뜻을 그냥 따랐는지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난 도박 같은 심정으로 일반대학원, 교육대학원, 임용고시를 한꺼번에 공부했다. 다 합격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뭐 하나라도 합격하지 않으면, 졸업 후 바로 군대를 다녀와야 해서 교사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졸업반이 되어서도 과외를 그만 둘 수 없었고, 아버지가 계신 시골 교회에 매주 주말에 가서 주일에 나오는 삶을 반복하여 물리적 시간 자체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그 불안함을 이기기 위한 인간적인 열심은 물론,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바랐다. 그분을 향한 시선이 현실의 절박함에서 나의 계산값을 외면하며 더 숭고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 가지 시험 중 하나라도 걸릴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저녁에 과외를 다녀오고 나서도 도서관에 돌아와 밤 11시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숙소로 돌아오며 오늘 하루의 한계 안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루었다는 뿌듯함으로 불안함을 물리치고 잠을 청하곤 했다.
결과론적으로는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세 가지 시험 모두 수석합격했기 때문이다. 안물안궁?ㅋㅋ
그 결과를 알았다면 불안함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함과 설렘의 경계에 있어서 생겼던 긴장감이 나를 더 절실하게 열심을 다하게 했고, 그분을 더 의지하게 했다. 그 은혜 안에서 난 물리적으로 나오지 않을 계산값을 넘어설 수 있는 축복을 누렸다.
그래서 난 대구 시내 유일한 군미필 교사로 학생들 앞에 서게 되었다. 대입 재수 한 해의 유예를 받았어도 고등학교 졸업한 지 5년 만에 교사로서 고등학생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임용합격의 기쁨은 현실에서 또 다른 불안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5년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내 말을 듣기는 할까? 과외 외에는 경력이 전무한 내가 중요한 시기의 아이들을 망치지는 않을까?
처음 인사하러 가니까 교감선생님께서 3월 출근 전까지 EBS 강의를 열심히 듣고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고 복장 코드나 교사의 마음자세 등에 대해서도 학생에게 주의사항을 주듯 꼼꼼하게 말씀해 주셨다. 교사로서 나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그 간섭이 내게는 오히려 감사였다.
난 그렇게 교사 같은 학생으로, 학생 같은 교사의 애매한 신분인 것처럼 아이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버스를 타고 학생들과 출퇴근을 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학교나 선생님들의 뒷담화도 들어야 했다. 학생들과 교문을 걸어 들어가던 어느 날 학생부장님이 교복을 왜 안 입었냐고 나에게 호통치시기도 했다. 물론 교사라고 하니 급사과를 하셔서 내가 더 무안했던 기억도 있다. 난 아이들과 함께 축구하고 농구하며, 마치 만학도나 복학생처럼 어울렸다. 애쓰지 않아도 학생들의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었고 오히려 거리를 두어야 할 정도로 가까웠다.
첫해는 담임을 주지 않았고, 군 휴직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교사로서 담임을 하지 않았던 해였다. 그저 수업에만 열중했다. 물론 정규 수업시수도 많았고 보충수업, 특별보충수업 등 엄청난 수업을 해야 했지만 기쁘게 감당하며 난 점점 학생에서 교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수업하는 내용을 학생들이 필기하는 것조차 너무 신기했다.
그 초임 학교인 대구고에 오늘 영어교사들을 대상 연수의 강의를 하러 간다. 학교를 옮기고 나서는 다시 교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던 그 공백이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곳에서 난 학생들을 처음 만났고, 첫 담임을 했고,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시작했고, 책도 출간했고, 월간지 정기 기고도 했고, 군대도 다녀왔고, 결혼을 했고, 큰딸도 낳았다. 군휴직기간 포함 5년 6개월간 난 교사로, 작가로, 군필남성으로, 남편으로, 아빠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 이루었다. 그리고 만났던 훌륭한 선생님들이 제자 같은 후배 및 동료교사로 존중해 주시고 가르침을 주셔서 그 이후에도 계속 성장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큰 힘을 얻었다.
그때 함께 1학년 담임을 했던 선배 선생님께서 교장선생님으로 계신 걸 확인하고, 인사드리는 순간이 벌써 감격스럽다.
학생이나 다름없던 나이로만 귀염둥이(?)로 챙김 받던 병아리 교사가 세월의 흐름을 등에 업고, 세월을 얼굴로 다 맞고 영어선생님들 앞에서 강의를 할 순간이 올 거라는 건 그때도, 나이가 충분히 든 최근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매 순간 진심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하니 내게 주어진 모든 만남이 감사하다. 그리고 돌아보니 내 능력을 넘어선 그분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교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삶이었다.
교사 대상 강연만 30회가 되어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긴장되고 떨리고 설레기까지 하는데... 오늘 강연은 내겐 그래서 더 특별한 의미다.
“학생중심 수업 및 학습코칭 설계(행복교육)”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영혼을 갈아 넣은 강의로 내가 누려왔던 행복과 축복을 아낌없이 나눠드릴 수 있기를, 훌륭한 선배님들로부터 받았던 소중한 가르침을 내 삶으로 다 전해드릴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 뵙게 될 선생님들의 학생들과 더 행복할 수 있게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