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by 청블리쌤

가즈오 이시구로은 2017년 노벨상 수상으로 유명해진 작가입니다. 일본 사람 이름이지만 영국 시민권자이며 일본 문학이 아닌 영문학 분야의 권위자입니다.

부커상까지 수상한 <남아있는 나날들>이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며 1993년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최신작입니다. 읽다가 놀랐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들>이라는 작품의 사실적인 통찰이 아니라 도깨비, 용, 괴물이 등장하는 판타지물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흥미로 가볍게 읽히는 동화 같은 판타지는 아니고 역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작품 중 가슴에 와닿았던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그 낯선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오늘 우리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감정이 마치 비를 머금은 잎에서 떨어지는 이 빗방울과 같은 건 아닐까 하는 거예요. 사실 하늘은 오래전에 비가 그쳤는데 말이에요.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의 사랑도 점점 빛이 바래져 완전히 사라져버릴 뿐, 거기에 다른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낯선 여자는 내게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가 함께 나눈 일을 기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당신은 이 안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나요?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감춰져 있는 편이 더 좋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안개는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어요.


- 우리에게 나쁜 기억도 되살아나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눈물 흘리거나 분노로 몸을 떨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 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확실한 정답을 품지 않은 채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당신의 기억은 안녕합니까? 그 기억으로 행복한지요? 아니면 망각하고 싶은 기억으로 인해 아프지 않은지요?"

그리고 작품을 읽는 우리는 삶으로 대답합니다. 삶의 길이와 삶의 깊이만큼 다양하게...

이 소설이 판타지인 것은 이런 의문들에 대해 현실을 벗어날 때에만 온전한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억과 추억은 우리의 행복의 원천입니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제 딸들에 대한 어린 시절의 행복의 기억 때문에 그들의 사춘기의 절정을 겪으면서도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히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놓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전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면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영역인 것이고 같은 일을 놓고도 다르게 기억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기억은 어차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으며 그 기억의 일치됨을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과 공통으로 공유하는 건 이 순간뿐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는 각자의 다른 영역인 것이구요.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지금 만들어내는 기억이 그 이전의 기억과 더불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아픔의 기억이 되더라도 여주인공의 이야기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 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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