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블리쌤 Mar 14. 2023

담임교사로서 화이트데이가 중요한 이유

빼빼로데이에 괜히 반응할 일 없다고 주장하는 교사인 내가 유독 약한 이벤트날이 있다. 화이트데이다.

화이트데이는 유래 없는 국적 불명의 날이다. St. Valentine’s Day는 남녀 관계없는 고백데이인데...


우린 유독 남녀를 분리하여 기회를 준다. 발렌타인데이가 여자가 먼저 움직이는 날이므로, 남자들은 먼저 나서서 고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혹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입장에서 섭섭해하면 좀 쪼잔해 보이긴 해도 발렌타인데이에도 안 챙겼으면서... 이러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안 받았는데 그럼에도 챙겨주는 게 더 큰 감동일 것이지만...


갑자기 어느 화이트데이에 겁 없는 선물을 아내에게 줬던 생각이 떠올랐다. 백지수표를 그려서 준 거다. 천만 원, 일억.. 이렇게 적으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했는지... 오래전이긴 했어도 그때 아내는 내 눈치를 살폈는지 10만 원을 적었고 아내는 이내 후회했다. 그때가 기억나냐고 물어보니 아내는 1억 원을 적을 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 했다ㅋㅋ. 


이번에도 화이트데이를 맞아 반 학생들, 학년 담임선생님들, 그리고 지난 둘째 수능 응시할 때 챙겨주셨던 여선생님들을 위해 사탕, 젤리, 초콜릿 봉지를 준비해 드렸다. 특히 학년담임 중 난 유일한 청일점이었으므로 사명감을 가지고 작정하고 준비했다.


오늘 아침에 나누기 전에 찍은 사진. 

봉지가 너무 컸고, 내용물이 담긴 부분이 불투명이라서 이번 포장 봉지 구입은 실패였다ㅠㅠ 


아침에 화이트데이인 줄도 몰랐던 선생님들이, 그것도 나를 통해 알게 되어 섭섭해하실 수도 있으면서도 내게는 한껏 과분한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셨다. 

선생님들이 물으셨다. 아내 것도 챙겼냐고... 아뿔싸... 안 챙겼다... 딸들 것도...

늘 반 학생들과 선생님들 챙길 생각에 가족은 뒷전인 듯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퇴근 후 꽃보다, 초콜릿보다 더 좋아할 뭔가를 아내와 두 딸들에게 보냈다. 전혀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성의 있고 없고를 논하지 않아도 되는 실용적인 그 뭔가를.. 백지수표가 아닌 내 마음속에 지정한 그만큼만 온라인으로 보내주었다. 둘째 딸은 예상대로 내게 엄지척을 날렸다.


화이트데이의 정신을 살려야겠다는 의도도 아니고, 상업적 목적의 기념일을 굳이 지켜야 할 이유는 없지만...

담임교사로서 내게 화이트데이의 의미는 학생들과의 교감을 위한 몸짓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학생들에게 오만상 무서운 척 연기를 할 필요가 점점 필요 없어져 가지만, 매년 초반의 엄격한 분위기에서 깜짝 반전을 꾀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마침 학년 시작 이후 2주 정도의 긴장감이 유지되는 시기여서, 이유 없이 뭔가를 받게 되는 것보다 명분(?)이 있는 날에, 그럼에도 기대도 하지 않았던 험악한 인상과 분위기의 담임쌤으로부터 포장까지 해서 정성이 담긴 선물을 받을 때의 학생들의 놀라움과 사소한 행복감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학생들과의 교감을 단 번에 이룬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늘 주변의 선생님들께 미안했다. 그래서 여고에서는 주변의 선생님들께 예고를 했다. 혼자서만 하기가 미안해서... 

아이들은 이 선물을 받고 나면 반드시 옆반에 가서 자랑하기 때문에 딴 반에 얘기하지 말라는 당부는 부질없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한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잔인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화이트데이 전에도 학생들은 나의 엄격함 뒤에 숨겨 있는 자신들을 위한 사랑과 진심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겠지만, 달콤함이 가득한 실물을 접하게 될 때 실체가 있는 구체적인 확신을 갖게 되는 듯했다. 이날 이후 나의 연기는 한계점을 지나서 긴장이 풀어진 채로 아이들에게 서서히 웃음을 흘리면서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해지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도 얼어붙어 있던 마음을 열 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포장한 정성에 더 감동하는 것 같았다. 여러 재료를 펼쳐 놓고 담으면서 자신들을 생각했다는 것이니까...



오늘 그 꾸러미를 다른 분들보다 늦게 확인하신 쌤이 내게 직접 포장하신 거냐고 물으셨는데, 옆에 계시던 쌤이 나 대신 이렇게 대답하셔서 받은 학년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섬섬옥수로 정성껏 하나하나 담으셨대요”

섬섬옥수라면 가늘고 보드라운 손을 의미하니 내게 어울리지 않는 반전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실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기획하고 아이템을 사서 세팅을 다 해놓고 한 봉지에 담을 내용을 모아서 전달하면 아내는 "섬섬옥수"로 봉지에 담고 막대끈으로 묶는 일까지 했었으니...


지금은 봉지에 담아서 접착하거나 철사끈으로 묶을 수 있도록 아예 포장지가 나오지만, 교직 초반에는 아내가 일일이 비닐포장지를 잘라서 테이프도 붙이고 리본도 묶는 등의 작업을 하기도 했다. 온 집안이 작업장이 되었고, 어린 딸들은 집어먹고 싶은 유혹과 싸우며 한참을 약 올랐을 것이다. 그 인내의 끝에, 포장이 끝나고 남은 것을 겨우 얻어먹으며 아쉬움을 달랬을 것이다. 


보통은 직접 마트에 가서 눈으로 보고 양을 대중하고 개수를 짐작해서 시장을 봤다. 학생 모두에게 공평하게 개수를 맞춰야 해서, 개수가 한두 개라도 모자라면 아예 그 아이템의 개수가 모두에게서 빠지거나 활용을 못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따져가면서 고민했었다.


지금은 시대가 좋아져서 온라인으로 구입하여 편하게 받아볼 수 있다. 나도 매년 하다 보니 이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상품구성이 가능해졌다. 전문가인 아내도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아이템을 보고는 만족해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아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옆에서 거들어 줄 수는 있어도 예쁘게 마감하고 마무리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아내는 때로는 홀로, 보통은 나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떤 때는 딸들의 노력봉사를 더해 매년 작품을 만들어 냈다. 학생들에 대한 나의 사랑의 마음을 존중해 줘서, 그 마음에 사랑을 얹어줘서 늘 고마운 마음이다. 

준비하면서 설레고, 전해주면서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거의 매년 이 의식을 멈출 수가 없다. 아이들과의 교감을 이룰 수 있는 첫 문턱 같은 기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가 들었는지, 얼마나 힘들게 준비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행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주는 자리에 자주 있다 보니 부담 갖지 않고 그저 기쁘게 받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보답의 일부인지 매번 실감한다. 난 여전히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익숙하지만, 기쁘게 받는 것도 큰 사랑의 표현일 수 있음을 느낀다.


학교의 모든 여선생님들을 챙길 수도 없고, 어설픈 사이에 어설프게 챙겼다가 얼마나 어색해질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에 학년실 동료선생님들 외에는 작년에 수능 치는 둘째 딸을 챙겨주셨던 몇 분의 분들께만 마음을 전하려 준비했다. 마침 그중 한 분께 몰래 전달해 드리려 메모를 작성을 마쳤던 그 타이밍에 놀랍게도 그분이 학년실에 내게 물어보실 일이 있어서 올라오셨다. 이왕 적은 메모와 함께 드리니까... “행복하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 나의 행복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인지 그 한마디의 여운이 밤이 깊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다. 

난 작은 봉지에 얼마 안 되는 달콤한 실물을 담아 전했을 뿐인데, 그 이상의 헤아릴 수 없는 행복감과 아이들과의 교감을 더 큰 축복과 선물로 받았다.




참고로 불투명한 포장지에 가려진 내용물 공개(40여 개 분량)  

    미니멘토스 1kg 1개(2개씩 넣고도 많이 남음)  

    자유시간 미니 초콜릿(1개씩)  

    후르츠텔라 요구르트 향 츄잉 캔디 590g 1개(3개씩)  

    미니 가나 마일드 175g, 3개(3개씩)  

    투시팝 미니어처 막대사탕 750g(3개씩)  

    허쉬 키세스 밀크초콜릿 52g 10개(3개씩)  

    애니멀 프렌즈 비접착 쿠키봉투 + 크라프트 막대 타이 50개  

작가의 이전글 중3 학부모 상담주간 예상 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