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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r 16. 2023

기다림이라는 설렘

두 주가 지나서야 우리반 첫 수업을 했다.


첫날 담임시간, 원어민 코티칭시간, 진단평가 등과 겹쳐서 수업으로 반 학생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반 학생들이 내게 수업 들어오시는 거 맞냐고 묻기도 했고, 드디어 수업하는 날에는 학생들이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완전 기대된다는 표현을 내게 해서 날 설레게 했다.


아이들은 담임교사 말고 수업으로 만나는 나의 페르소나가 궁금했을 거다. 나도 우리반 수업 분위기를 간접 체험만 했다. 들어가시는 선생님들마다 액티브하면서 수업 분위기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드디어 수업 들어가자마자 한 학생이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어요”라는 화두를 던졌다. 첫 시간을 적당히 때울 낚시질로 참 좋은 말이었다.


난 오랜 교직경력으로 적당하게 방어했다.

“나에 대해 하나만 알려줄게.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게?”

“뉴진스!” 학생 하나가 바로 맞혔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너 개인 취향 말하지 말고.” 이러니까 한 아이가 내 취향을 알겠다는 듯 신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소방차!!” 순간 내가 좋아한 가수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 아이들 나이였을 때 전성기였던 가수여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덕밍아웃했다. 뉴진스 팬이라고. 강고양이가 최애라고... 귀여운 컨셉이 마음에 든다고.

담임반의 수업이 이렇게 오래 지연된 것도 처음이지만, 학생들이 내 수업을 이렇게 기다려주며 표현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들은 설렜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설렜다. 기다림이 길수록 설렘으로 누릴 수 있는 시간도 더 확보되는 느낌이다. 물론 설렘에도 유효시간이 있긴 한 것 같다. 너무 오래 기다리면 설렘이 지침이 되고, 고갈되어 갈 수도 있으니까...


설렘은 글쓰기에서도 해당되는 것 같다. 다음 내용이 뭔지 궁금해야 약간의 설렘이 생긴다. 그걸 흥미라고 말하기도 한다. 너무 뻔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이어가면 하나도 설레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걸 “의도적인 불친절의 필요성”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내 마음대로 글을 막 쓰면서 한 번씩 너무 뻔한 이야기를 기대감도 들지 않게 이어가고 있지 않은지 부끄러운 마음으로 돌아본다.


정작 수업이 시작되어서는 첫 순간의 설렘의 눈빛이 점점 일상적인 눈빛이 되어갔다. 아이들은 내 수업에 그들이 개입할 경계가 어딘지 확인하려 하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헛소리를 해도 선생님이 용납해 줄지를 용감한 학생들이 정찰대처럼 먼저 나서서 알아보려는 느낌을 받아 난 바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내 수업시간에는 말을 하려고 애쓰거나 고민할 필요 없다고. 내가 말하라고 허락하기 전에는 나 혼자 말할 거라고. 질문이 있어도 하지 말고, 수업시간 마치고 개별적으로 물으라고.

정찰대 임무 실패를 확인하고 아이들이 급잠잠해졌다.


올해 우리 반이 적극적이고 수업시간에 반응이 좋다는 이야기에 좀 낯설었다. 우리반은 보통 조용하고 소심하게 수업시간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담임인 내 영향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적이 많았는데 왠지 그 가설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2주간 담임선생님의 수업스타일을 겪어보지 않은 채로 활발하게 있다가, 내 수업을 뭐 하러 기다려야 했던가 하는 부질없는 괜한 기대감을 그냥 접어 두는 것 같았다.


난 한 시간 내내 수업을 빡빡하게 꽉꽉 채워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했다. 아이들의 설렘의 이유를 잘못 해석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 아이들과의 첫 수업을 기다리면서 설렘의 개념을 재정의했다.

기다림 자체가 설렘인 것이었다. 물론 막상 그때가 오면 덤덤하기도 하고, 혹은 허탈해 할 수도 있다.


아내는 피아노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너무 큰 열정으로 아이를 대하는 바람에 아이가 울었다고 했다. 그 아이가 학원에 나올지 궁금해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설레겠다고 얘기했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는 모든 것은 설렘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자신의 연습이 부족해서 선생님의 지도에 잘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속상해서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학원에 와서 더 열심히 레슨을 받고 갔다며 아내는 너무 행복해했다. 결과도 선했지만, 그 기다림의 과정이 불안함보다 설렘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존경하는 수석선생님 두 분이 나를 만나자고 초청을 해주셨다. 교사연구회에 3년 연속 강의를 초청해 주셨던 분인데 이번에는 사적인 만남을 원했다. 강의처럼 무대에 올리지 않는 그저 꾸밈없고 포장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 설마 이런 얘기까지 해도 되나 싶은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그러니까 무대 뒤에 뭐가 더 있을지에 대한 궁금함이었던 것 같고, 얘기 해놓고 이불킥할 정도의 그런 이야기들까지 기대하시는 듯했다.


퇴근 후 그 먼 거리를 두 분이 둘러둘러 우리학교 근처까지 찾아오신다고 하니 그 간절한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그저 그 만남이 기대가 되어 거절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부담 없이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라서, 꼭 내가 주인공일 이유는 없는 거였다.


그래서 선생님께 “설레는 초대”라며 승낙했다.


얼마 전 블로그 포스팅 중 “보급형 글쓰기”를 읽고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늘 꾸준히 쓰는 비결이 뭐지? 대체 언제 쓰시지? 일상의 중심이 글쓰기여도 나름 원칙이 있을 건데 하는 생각...

수석쌤 두 분은 아마도 다음 주의 만남까지 설렘으로 기다리실 거다. 그러고는 만나자마자 그 길고 머나먼 길을 굳이 돌아돌아 올 정도는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 초대는 아니니 나는 부담이 없다ㅋㅋ 환멸도 배움의 일부일 것이니 어쨌거나 선생님들께는 이로울 것이라는 뻔뻔한 생각으로 나도 설레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 어느 정도까지는 설렘을 선택할 수도 있는 거다. 그 설렘은 기다림을 통해 발현되고, 설렘은 기다림의 동력이기도 하다.


삶은 대부분은 기다림으로 이뤄진다. 한 번에 원하는 타이밍에 이뤄지는 것이 특이하고 신기할 정도다. 그럼에도 모두가 서두른다. 설렘 따위는 사치가 된지 오래다.


예전에는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면서 이 사람이 나타날지, 언제 나타날지, 어디쯤 오고 있을지, 혹 다른 데서 헤매고 있지는 않을지, 그 무한한 가능성에서, 그 불확실함 속에 설렘을 채워 넣었다. 그러나 지금은 약속시간도 채 되기도 전에 휴대폰으로 묻는다. 어디냐고. 도무지 설렘의 여지가 없다.


학생들, 아니 학부모님들도 아이들의 실력향상에 대해, 아니 성적향상에 대해 설렘 없이 바로 결과를 마주하길 원한다. 아이들은 충분히 멈춰서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떠올릴 여유를 갖지 못하고 결과에 내몰린다.


교사나 부모나 아이들의 교육적 변화는, 특히 자발적인 진짜 교육적 효과는 기다림이라는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입으로는 기다릴 수 없다고 아이에게 조급함을 심어주기도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기다림은 괴로울 수도 있고, 설렐 수도 있다. “꼭 그래야 한다” “적어도 언제까지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서만 벗어나면 설렘모드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그냥 과정에서 설레고 행복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보너스처럼 얻게 되는 성취에 훨씬 더 깜짝 기뻐할 것이다.


기다림은 설렘이다. 설렘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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