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프로야구 출범할 때의 그 영상이 제 뇌리에서 영영 지워지지 않습니다. 완전 신세계였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감정이입하며 승리에 환호하고 패배에 좌절했던 매 순간이 제게는 설렘이었습니다. 미국의 뉴욕 양키즈와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 잘 나가는 선수를 영입하고 그래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팬들은 열광하고 그 열광한 것에 따른 높아진 수입으로 선수를 또 영입하고, 그러면 팬들은 패배보다 승리에 기뻐할 일이 더 많아지게 되니 패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탑독(강자)를 응원하는 거니까요. 물론 지금은 더 효율적인 구단 운영으로 인해 판도가 많이 달라졌고, 소위 언더독(약자)의 반전에 열광하는 이들이 더 많아져서 예전 같지는 않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그 프로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습니다.
예전 기억을 불러 모으는 <삼미슈퍼스타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에서 작가는 ‘회개하라, 프로의 날이 머지않았다’라는 소제목으로 프로가 주는 복음이라는 테마로 프로의 영향을 정리합니다.
1.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2. 난, 프로라구요: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의지를 공고하는 말
3.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비열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룬 자들이 하는 말
4. 하루빨리 프로가 되게: 직장 상사가 신입사원들에게 하는 말
5.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미전향 아마추어들에게 하는 말
6. 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그 어원은 '옆집보다 우리 집이 더 맛있어요'
7. 이러고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나? 주로 실수를 범한 부하 직원에게 상사가 내뱉던 말.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8. 프로의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이다: 아직 멀었다. 더 높은 경지의 프로의 세계가 있으니 분발하라.
9.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마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활화 고착을 목표로 하는 말
10.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그 원래 뜻은 ‘옷 사세요’
11. 프로 주부 9단: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만든 말
이런 프로의 세계에 삼미 슈퍼스타즈 야구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팀이었지요.
작가는 그 야구팀의 팬으로서 그 팀의 야구를 이렇게 변호합니다.
삼미 팀은 자신의 야구를 했다. 그 야구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그게 가장 힘든 야구야. 이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하기 힘든 야구인 것이지. 왜? 이 세계는 언제나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이, 잘하는데. 조금만 더 잘하면 될 거 같은데?
작가에게 삼미 슈퍼스타즈팀은 프로이기를 거부한 순수한 열정의 팀이었던 것이지요. 더 욕심내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즐기는 프로 세계의 아마추어였던 것이지요. 아마추어의 어원은 좋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스스로의 삶이 삼미 슈퍼스타즈 야구팀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근데 그 은유 사이에 흐르는 작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뭐?”
모두가 성공이라는 프로의 모토를 가지고 삶의 아름다움을 희생한 채 달려가는 상황을 작가는 직시하고 있지요. 투스트라이크 쓰리볼은 가슴 졸이는 볼 카운트입니다. 공 하나에 삼진으로 아웃당할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지요. 그저 기다릴 수 없다면 방망이를 휘두르면 됩니다. 물론 휘두른다고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지요. 마지막 공을 칠 수 없어 기다렸는데 그래서 삼진인 줄 알았는데 투스트라이크 포볼이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1루로 나가서 쉬라고. 쉬고, 자고, 뒹굴고, 놀라고...
작가는 그렇게 여유와 즐거움을 회복하는 삶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 : 1할 2푼 5리의 승률로, 나는 살아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라고도, 나는 말할 수 있다. 함정에 빠져 비교만 않는다면, 꽤나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뭐 어때, 늘 언제나 맴맴맴.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제 딸들은 이제까지 학원, 과외 등의 사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사교육은 그 전제 자체가 남들보다 앞서가기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선행학습은 100미터 달리기하는데 남들보다 한두 발 더 앞서 뛰려고 거리를 단축하려는 시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잘 뛸 수 있는 지구력과 근력이라는 겁니다. 그 기본기와 내공을 충분히 갖추면 몇 걸음 앞에서 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실제로 사교육을 받는 것은 특히 자기주도적으로 필요한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경우라면 불안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안도감을 위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안도감이 절실함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고등학생인 제 딸은 수학을 혼자 공부하며 왜 그런지 이유를 따져가면서 공부합니다. 남들처럼 선행도 안 했는데 더 답답하고 느린 행보입니다. 궁금해서 친구들에게 물으면 그런 건 모르면 된다고 하면서 그런 질문이 귀찮다고 딸을 피해 다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수학을 그저 기능적으로 익히고 풀이를 반복연습해서 많이 풀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의 정돈된 수학 풀이를 보고 제 딸이 자신의 간단한 방법을 보여주니 그 친구가 천재 아니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암기하듯 외운 풀이보다는 허접하지만 이해하고 수학을 즐기면서 나오는 결과물이 시간이 더디고 답답하지만 더 즐거울 수 있겠지요. 실제로 제 딸은 수학을 재미있게 공부합니다. 앞으로 남은 수학 진도의 분량으로 인한 부담은 있지만 제가 강조하는 것은 그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분량까지만 감당하는 것입니다.
영어는 딸이 중학교 때부터 제가 지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지도한 내용만으로 성적의 변화가 생기지 않습니다. 공부하도록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 맞겠지요. 절대 서두르지 않고 아이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향을 정해주었습니다. 중학교 영어성적이 50점대를 기록할 때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기다려주고, 빠르게 실력 성장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딸을 위해 만든 가장 기본인 필수영어단어 1300개 목록을 반복해서 읽도록 했고 당장 암기 못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망각을 권장하였습니다. 부지런히 망각하면 결국은 자신의 억지스러운 의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기억에 자리 잡게 될 거라는 확신으로요. 그리고 기본적인 영어의 원리를 터득시켰습니다. 지식 위주의 문법이 아닌 본질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문법과 구문(문장의 짜임새)을 지도하면서 영어 문장 자체에 대한 내공을 쌓아갔습니다.
공부 잘 하는 친구 중에는 영어 내신 대비할 때 지문을 암기할 정도로 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딸은 그저 기본에 충실한 채로 범위의 내용을 스스로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원리에 충실한 학습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영어가 여유있게 할 자신 있는 과목이 되었습니다.
국어는 읽기 능력이 기본이니 책을 읽도록 유도했고, 요즈음은 책 읽기에 게을러져서 정기적으로 모의고사 지문 읽고 요약하도록 하는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문제푸는 것보다 독서의 즐거움을 갖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이 아이가 감당할 수준과 분량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사교육 없이 공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교할 때마다 불안해하고 흔들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알고 터득하는 즐거움을 갖도록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프로의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프로는 즐거움조차 저당 잡히면서 해야만 하는 것들 필요 이상으로 욕심내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 말이지요.
딸이 고등학교 입학해서 최고 절정의 성적도 받았지만 전 그런 등수를 요구한 적도 계속 유지하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본인이 욕심내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다시는 그런 등수를 받지 못할 것이니 스스로 과한 기대는 하지 말고 무리하지도 말라고 이야기해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대로 등수가 미끄러졌지만 괜찮습니다.
프로보다 아마추어가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제 딸이, 저희 반 학생들이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프로보다 아마추어처럼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빚을 지지 않는 방법은 번 돈보다 많이 소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으면 그만큼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는다면 적은 것에 만족하는 방법입니다.
행복 = 현실 / 기대치
이 행복공식은 1등이 더 행복할 거라 보장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