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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pr 28. 2023

딸에게 드립치며 슬쩍 영어 잔소리

어제 집공의 야무진 꿈을 안고 일찍 귀가한 재수하는 둘째 딸에게 물었다.

"공부하는 게 고생스럽지?"

(재미있지라고 물었어야 했다. 공부는 힘든 거라는 인식을 은근히 심어주면 안 되는 거였지만,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이 투영되는 바람에 실언을 했다ㅠㅠ)

딸은 말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끄덕끄덕"

그래서 바로 내가 말해주었다.

"너 서울 가면 집 떠나서 혼자서 고생인데... 빨래도 청소도 다 너 혼자 해야 하고... 그 고생을 하려고 이 고생을 하냐?"

별 반응이 없길래, 혼자서 "오~~오~~!"이렇게 내 드립에 스스로 놀란 듯 감탄을 하니까 딸은 어이없는 듯 웃으면서 반응을 보였다.


마침 잔소리 타이밍인 것 같아 슬쩍 물었다.

너의 영어는 안녕하냐고

별로 안녕하지 못한 듯했다. 딸은 요즘 단어와 천일문을 다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충분히 리허설을 마쳤는데 무대로 안 나가고 주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아직 충분히 실력을 끌어올리지 못한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국어와 수학 공부를 하면서 영어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뒷전일 거라고. 시간 남으면 조금 하고, 시간 안 남으면 오늘은 영어 할 날이 아니니 내일 하지 뭐.. 이렇게 미뤄두고 있을 거라고..

딸이 놀랐다. 어떻게 알았냐고.

매일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상담을 자주 하는 내가 그 정도 감을 잡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어는 수능 수준을 완성한 학생들도 다 되었다 싶어서 안 하고, 잘 안되는 학생들도 당장 오늘 안 해도 별일이 없을 것 같고, 해도 안 해도 당장 실력이나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아 미뤄둔다. 처절한 현실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핑계를 만들어가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그런데 딸이 천일문을 보면서 자신의 무지함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책에서 동명사와 분사의 차이를 알아보자고 하는데, 동명사가 뭔지, 분사가 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게 된 것이었다.

난 그 얘기를 듣고는 한참을 정지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딸은 막 웃었다. 나도 함께 웃었다. 그건 좀 너무 하긴 했다고 하면서도 괜찮다고 했다.

나도 수업할 때 명사 없이 나오는 to do, doing은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명사와 함께 나올 경우 각각 "-할", "-하는"이라고 해석하니 얘가 동명사니 분사니 따질 필요 없다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서, 아마 딸과 공부할 때도 그 의도가 전달되었을 거다.

학원에서 문법을 많이 공부한 학생들은 문법용어에 익숙한 상태에서 내 수업을 들으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해석에 적용하는 구문독해로 전환되지만, 딸은 학원에 다닌 적 없이 아빠에게만 영어를 배웠으니 그런 기본적인 용어에도 익숙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그래도 해석에 적용되고 문장 분석이 되면 괜찮다고 해주었다.


그리고 일부러 역행하듯 돌아가지 말고.. 그동안 구문독해를 충분히 했었으니 기출이나 EBS 등의 지문을 자꾸 만나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꼼꼼하게 분석해 보라고 했다. 단어도 대략적인 그림이 들어와 있을 것이니 맥락에서 의미를 추론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재수하는 의미 중 가장 중요한 건 영어임을 다시 상기시켰다. 수학은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거기까지지만, 영어는 대학 가서도 원서를 봐야 하고 이후 배움에 필수역량이 될 것이니... 시간을 많이 들여도 된다고 했다.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도록 시간을 확보할 것을 권했다.

지금 여유가 있다고 생각될 때 영어를 좀 땡겨 놓으면, 그래서 어떤 지문이든 새로운 정보를 여유 있게 접하며 재미를 느낀다면 이후 더 바빠질 때 큰 힘이 될 거라고... 미뤄두다 보면 손을 못 쓸 상황이 생겨, 국어, 수학 1등급 맞고도 영어 때문에 좌절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아빠와 수업을 한 번씩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니까... 절대 안 된다는 확고한 반응을 보였다.

고1 말에서 고2 초까지 나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줌으로 원격수업(본인은 야자 마치고 아이패드 들고 독서실에 가고, 난 집에서 노트북으로)을 했던 딸은 끝까지 그 거리를 좁혀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서 분석 안 되는 문장은 모아서 함께 보자는 제안으로 타협했다.


뭐든 잘되지 않을 때, 자신감이 없을 때는 재미도 느끼기 어렵다. 그러면 성취지향적인 학생들은 아예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 초라한 과정에서는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예측할 수 없어 좌절감에서 벗어나오지 못할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어 절대평가가 아이들에게 그런 유보하는 태도에 명분을 실어 주었다. 절대평가가 문제가 쉽다는 의미는 아닌데, 어쨌거나 상대평가보다는 덜 해도 된다는 막연한 안도감이 아이들의 최소한의 긴장감까지 바닥내고 있는 느낌이다.


얼마 전 고3 대상 영어1등급 프로젝트 수업을 마무리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제한된 시간과 조건 내에서 다 쏟아부었다. 그런데 같은 지역 다른 학교에서 요청이 들어와서 수업제안서를 학교에 보내드렸다. 5월은 여유를 누릴 시간은 아니지만, 절실함으로 인생을 걸고 영어에 몰입할 학생이 있다면 만나주고 싶다. 내 역할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학생들의 간절함과 몰입하려는 의지와 만나면 아직은 가능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고3이 되기 전 고1의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1 담임을 늘 주장하며 맡으려 했지만, 고1보다 고3의 간절함은 확실히 더 크긴 하고, 각자의 살아온 과정이 다 다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축적된 영어가 내재되어 훨씬 더 빠른 시간에 기대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 기대수준은 수업 듣고 바로 1등급이 되는 것이 아님은 명확하다. 어떤 과목도 어떤 수업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하는 노력과 이후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기대수준에 이르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낭비하며 헤매지 않고 가장 효율적인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영어문장을 해석하고 문장을 축적하며 독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자신의 욕심만큼 꾸준함을 전제로 쭉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어제 보냈던 수업제안서에 "심화파닉스"가 있어서 고3 영어쌤이신 담당선생님이 실제로 그걸 하는 거냐고 문의를 하셨다. 이 바쁜 고3 시기에 수능독해를 하기도 바쁠 텐데...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답변드렸다. 발음원리를 확실하게 익혀서 이후 단어발음을 암기하지 않고 읽을 수 있게 된다면 단어를 익히는 효율성이 더 높아질 거라고.

마음이 급해서 평소에 돌아보지 못했던 그런 기본기가 이후의 시간과 노력을 덜어 줄 거니까.


급할수록 모의고사를 수준 높여서 풀기만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방법으로는 영영 자립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3이니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게 해주고, 덜 암기하게 해주면서, 기본기를 확실하게 해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점차 스스로 독해를 이뤄나갈 것이니까...


그래서 5월보다 3월에, 3월보다 고2가, 고2보다 고1이, 고1보다는 지금 내가 수업을 하는 중3이 그걸 해내면 훨씬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인데... 이렇게 학년이 내려갈수록 간절함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5월...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만나는 것이기를.. 아직은 본인 스스로 내공을 쌓아갈 기회가 주어져 있으니까.. 더구나 진로과목 위주로 편성되어 내신의 부담이 덜하고, 수시로 대학을 가려고 하는 데 영어로 최저등급을 맞추는 것이 절실한 학생들이 그 절실함의 크기만큼 본인 스스로가 매 순간 성취감으로 역사를 써 내려가기를 기대한다.


난 교사로서 절실함을 마주하는 가장 큰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감히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두렵고 떨리지만, 설레는 자리에 있을 수 있음이 늘 감격스럽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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