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공부를 해왔고, 학생들을 만나 공부하는 방법을 코칭해왔다. 정작 나는 어떤 학생이었고 어떻게 공부를 해왔는지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이상적인 공부방법을 제시하려는 것도 아니고, 코치보다 선수가 더 잘하는 것도 흔한 일이겠으며, 쑥쓰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리를 잡아갔던 초등, 중학교, 고등학교, 재수, 대학 이후 등의 시절별 나의 공부 기록을 정리해 보려 한다.
'라떼는 말이야' 기록이 될까 두렵지만, 나의 경험에 더해서 마치 교육평론가가 된 것처럼 그 당시 나의 공부방법과 방향을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분석해 보려 한다.
<초등학교>
경기도의 소도시의 제법 큰 초등학교 2학년 때 월말고사에서 운 좋게 전 과목에 한 개를 틀려서 공동 전교 1등을 했다. 아마 찍은 거 다 맞아서였을 것이다. 실수로 1등을 한 거였지만, 아버지는 선물로 위인전 전집을 사주셨다. 마냥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칭찬과 격려의 메시지를 온몸의 부담감으로 받아냈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의 독서와 책의 중요성에 대한 가치관이 은근히 내게 전달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삼국지, 수호지 책을 크리스마스 아침 깨어나자마자 산타의 선물을 받듯 머리맡에서 확인하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자발적인 즐거움의 시작도, 원하지 않았던 책 선물을 억지스럽게 받은 것으로부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지나고 나서야 감사해지는 일이 있다는 걸 체험할수록 부모와 교사의 임무는 참 어렵다는 걸 더 실감한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고, 소위 인싸도 아니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친구들 무리에서도 주변인에 불과했다. 친구들 사이에 축구할 때 서열로 공격수, 수비수, 골키퍼를 보던 그 시절 만년 후보로 있다가 골키퍼로 한 번씩 간신히 끼고는 너무 좋아했던 기억도 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아버지가 교목(학교목사)으로 계시던 고등학교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아니 고등학교에 태권도부가 있어서 그냥 형들 사이에 흉내 내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라는 아버지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받았다.
처음 태권도를 배우게 된 것도 아버지의 승부욕 때문이었다. 연년생인 동생과 길을 갈 때 동네 아이들이 집단으로 돌을 던지며 우리를 공격했는데, 난 혼자서 도망가지 않고 바위 뒤에 숨어서 동생을 지키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분노하시면서 그 주동자에게 가서 일대일로 맞짱을 뜨라고 하셨고, 옥상에서 그 아이의 집에 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셨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그 아이가 집에 없어서, 당당하게 맞서려면 힘이 필요하다고 태권도를 가는 걸로 결론을 냈던 것 같다.
(그때 태권도하러 가거나 아버지를 뵈러 가면 고등학교 형과 누나들이 날 너무 귀여워해 줬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때는 내가 어른이 되어 고등학생들을 귀여워해 주고 예뻐해 주는 교사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린 나이 때부터 고등학교의 분위기와 교정의 모습을 오감으로 느끼면서 영영 학교에 머무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때 내게 고등학생 형, 누나는 너무도 높고 먼 존재였지만,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 같다. 아버지 덕분에 난 학교라는 공간이 너무 익숙해졌고 편해졌다 )
그런 아버지의 노력에도 난 마냥 소극적인 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2학년 때부터 나홀로 독서에 빠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고 하교해서 샤워하고 드러누워 혼자 독서하던 그 황홀한 행복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책을 보며 웃고 울었고 그 안에서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나만의 세상을 확장해갔고, 감성도 키워갔다.
그때는 그저 좋아서 자발적으로 책을 봤지만 그게 공부를 하는 준비였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지능에도 영향을 준 것인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 115 정도였던 IQ가 중학교 때 IQ가 155가 나왔다.(고등학교 교사 첫해에 학생들에게 내 IQ를 공개하니까 아이들이 선생님 키(신장) 얘기하지 말라던 웃기는 기억도 떠오른다ㅋㅋ)
그것도 독서의 영향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난 딸들에게 공부학원이나 사교육 대신 책 읽을 환경을 조성하고 반강제적으로 책을 읽혔고 교사로서 학생들에게도 끊임없이 독서를 강조하고 있다.
아버지는 사립고등학교에서 교목과 도서관 사서를 겸하셨다. 덕분에 난 원 없이 고등학교 도서관에 가서 원하는 책들을 골라서 볼 기회가 있었다. 책을 마음껏 사 볼 수 없었던 집안 형편에 내게는 넘치는 축복 같은 기회였다.
그런데 5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내 독서생활에 개입하셨다. 문고판이나 재미 위주의 책이 아닌 고전 완역본을 보라고 권하셨고, 첫 미션으로 던져주셨던 책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였다. 책의 두께에서부터 난 압도당했고 그 전에 보던 책만큼 술술 읽히지 않은 답답함을 견뎌내며 꾸역꾸역 한 단계 올라선 독서의 세계에 겨우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책읽기가 힘겨웠던 것만큼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따뜻한 동화적인 세상에서 인생과 현실의 쓴맛도 제대로 느꼈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영화에서 남주가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분노하면서 헤밍웨이에게 따지려 했던 장면이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다. 나도 딱 그랬기 때문에 너무 공감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원망스러웠지만 나의 독서 세계를 하천에서 큰 강으로 들어서게 한 것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어서 지금은 너무 감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난 딸들이 초등학교 때 <해리 포터>책을 읽게 된 것이 유감스럽다. 그 전에는 내가 골라 준 책을 거의 섭렵했지만, 그 책을 본 이후에는 재미있는 책과 재미없는 책을 가려서 보려는 편식하는 독서 습관이 들어서 오히려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2막은 4학년 때부터였다. 원래 초등학교가 너무 컸고 멀리서 통학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게 되어 분교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주소지에 따라서 좀 더 작은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무대가 작아져서였는지, 내가 좀 더 당당한 자신감이 생긴 것인지 4학년 때 바로 반장이 되었고, 운동회 때 곤봉 공연에서 학년 대표로 서기도 했다. 운동회 때 운동경기뿐 아니라 단체 공연도 힘겹게 준비했던 시절이었다.
또 학교 축구부에 선발되어 주장으로 겨울방학 동계훈련까지 열심히 참여했다. 축구부 담당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전근으로 시합 한 번 못 뛰고 해체되었지만,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 때 축구에 대한 열망과 재미를 이어갈 수 있는 기본기를 쌓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마치고 축구도 열심히 했다. 비가 와도 수중전을 했고, 뜨거운 여름날에도 웃통을 벗어던지고 뛰고 나서 학교 수돗물을 생명수인 것처럼 갈증을 해결하던 그 짜릿한 느낌도 아직 살아 있다.
실은 야구에 더 큰 열의가 있어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야구를 했고, 아버지께는 야구선수에 대한 꿈을 품고 야구부 있는 학교로 전학 보내달라는 요청까지 했었다.
어려운 형편에 4학년 때 유행처럼 많이 다녔던 주산학원을 몇 주 동안 째고 야구하러 다녔다가 들켜서 엄청나게 야단맞았던 걸 생각하면, 난 그렇게 모범생이 아니었고, 공부에 대한 열의도 없었으며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고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실수로 반짝 1등 했었던 것 외에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도 없고, 열심히 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던 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셨다.
내가 자는 줄 알고 대화하시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었다. 내가 공부를 하면 정말 잘 할 놈이라고... 그게 내게는 격려로 들렸고 기분이 좋았다. 특히 부모님께 직접 들었다면 부담감이 컸겠지만, 내가 그 얘기를 들은 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어서 난 못 들은 척해도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편했다.
5학년 때는 부모님께 눌려 있던 나의 사춘기적인 반항이 학교에서 폭발하던 시절이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께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묘사될 정도로 난 심각한 문제아였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내 인생 3막이 열렸다. 6학년 초반에 아버지께서 시골교회의 목사님으로 부임하시게 되어 전학을 가게 된 때부터였다. 4학년 때부터 더 작은 무대에서 난 더 당당해지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며 활발한 학교생활을 했고, 너무 과도한 활발함으로 스스로 통제가 안 되고 사고뭉치가 되었던 그 절정에서 겨우 벗어나, 훨씬 더 작은 무대의 초등학교로의 전학은 낯섦 외에도 전원생활 같은 여유를 내게 주었다. 집 밖을 나서면 골목골목 집들이 몰려 있고 바로 차도가 있고, 가게와 상점이 즐비한 소도시에 있다가, 교회 옆 사택을 나서면 드문드문 집이 보이고, 논으로 둘러싸여 있는 탁 트인 시야가 완전 다른 세상의 문을 들어선 것 같았다. 하루에 몇 대 안 되는 버스를 타거나, 50분 이상을 걸어야 그나마 더 자주 다니는 버스를 탈 수 있는 동네였고, 그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가게와 상점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학생들이 자전거로 오랜 시간을 통학했다. 가을이 되면 길옆으로 사람 키보다 큰 코스모스 꽃들의 환호를 줄지어 받으며 자전거로 지나가는 황홀한 느낌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정해놓은 시간에 앉아서 억지로 공부했던 기억이 있지만, 그게 일상이 되지는 않았다. 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시험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학을 와서 무슨 이유에선지 시험 전에 열심히 공부를 해보았다. 전 과목에서 하나 틀린 1등이었다. 이번에는 실수로 1등 한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아마 독서를 통해 책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고, 이해도가 좋아졌던 덕을 톡톡히 본 것 같았다. 짧은 시간에 효율적인 공부가 가능한 느낌이어서, 그 전에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는데도 공부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평소에는 실컷 놀았지만, 시험공부는 열심히 해서 올백이나 한 개 틀리거나 하는 1등의 삶에 들어서게 되었다. 공부하는 게 어렵지 않은 데다가 1등이라는 인정받는 느낌이 강요 없이 자율적으로 공부를 계속하게 했다.
전학과 동시에 무대는 훨씬 좁아졌지만 어쨌거나 전교 1등의 삶이 시작되었다. 공부 자체의 즐거움이 아닌 외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시기였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공부 정리
공부를 제대로 안 했다. 그저 스포츠에 푹 빠져 있었고 그래서 어린 시절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분출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고,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자발적 독서의 즐거움에 빠졌다. 당장 성적에 직결되지 않아도 결국에는 공부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독서능력이라는 걸 삶으로 체험했다. 물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책 읽을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고 내게는 그런 축복이 주어졌다는 걸 감사로 깨닫게 되었다. 그게 또 내 평생공부의 바탕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 믿음으로 딸들을 학원 보내지 않으면서도 여유 있게 책을 읽힐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무대에서 얻어낸 사소한 성취의 중요성...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성취여야 큰 부담감 없이 지속할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그리고 그 성취는 부모나 교사의 성취가 아닌 아이 스스로 느끼는 자발적인 성취여야 한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