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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y 08. 2023

나의 공부 연대기5 (대학시절과 그 이후)

결과적으로 부모님은 서울대 영어교육과 합격할 성적으로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진학할 때도 그저 선택을 받아주셨다. 아니 서울에서 생활하기에는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경북대 전체 수석을 못해서 뉴스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하시긴 했다. 그래도 사범대 차석을 해서 4년 전액 면제 장학금도 받았다. 

지금처럼 수능을 먼저 치르고 원서를 내는 거였다면 서울대를 선택했겠지만, 원서 먼저 쓰고 시험을 치렀던 학력고사 시절에, 또 떨어지면 군대 가야한다는 절박한 위기감과 나의 소심함으로 인해 안전함에 타협해서 원서를 쓰고는 아침에 샤워할 때마다 좌절감과 한심함에 목놓아 울었던 아픈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다.


대학 입학해서 서울대를 갈 수 있었던 성적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더 힘들었고, 어차피 사교성이 없어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핑계로 대학 입학 첫 해에는 학과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저 혼자서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공부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래봐야 주말마다 아버지 계신 교회로 가서 하루나 이틀 지내고 나왔고, 과외 알바로 이틀이나 사흘 저녁은 내 시간이 아니었다.


장학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도 난 시험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이 늘 있었다. 방어적 비관주의 경향으로 놓치는 것 없이 촘촘히 그물망을 던지듯 범위를 꼼꼼하게 훑었고, 시험 전에 20번 이상을 봐도 마음이 늘 불안했다. 

공부는 늘 N회독 방식을 택했다. 무조건 암기하는 건 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밑그림을 그리고 세밀하게 반복하는 식으로.. 가급적 시간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읽어 결국 암기했다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그래서 성적은 늘 최상위권을 유지했지만, 너무 지치고 힘들긴 했다. 사실 그 정도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서 반복한 면도 있었다.


군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4학년이 되어 필사적으로 뭔가를 걸쳐두어야 했다. 그래서 일반대학원, 교육대학원, 임용고시를 동시에 준비했다. 영문학과 영어학 전공은 모든 시험의 방향이 비슷하기는 했지만, 임용고시의 경우 전공이 객관식이었던 시절이어서 대학원시험과는 공부방향이 많이 달랐고, 독해력을 측정하는 일반영어도 추가로 해야 했고, 교육학도 따로 준비해야 했다.

교육학 기본서는 빡빡한 내용의 벽돌책 두 권 이상의 분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도 방대한 양이어서 동기들은 모두 교육학 학원을 다녔다. 그 당시는 당연히 인강이 없었다. 인터넷도 제대로 보급되기 전이었으니까. 방학 때는 서울까지 다녀왔다는 얘기도 들렸다. 난 학원비의 부담도 있었지만, 그냥 혼자 해도 될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학원에서 정리하면 단기속성으로, 좀 더 용이하게 공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혼자 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믿고 싶었다. 물론 많은 시간과 방황도 필연적으로 거쳤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니 단원별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N회독의 느낌으로 반복을 거듭하면서 세밀하게 보는 방식을 선택했다. 몇 번을 훑고 나면 처음엔 막연했던 것들이 구체화되고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암기하려 애쓰지 않았는데 기억에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감이 늘었던 것 같다. 


보통 학생들은 조급함으로 인해 한 과목을 다 완성하고 그 다음 과목을 도전하기도 하는데, 완성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완성되었더라도 다른 과목 공부할 때 증발되기 때문에 효율적이지 않다. 그리고 뒤의 내용까지 대충이라도 훑어야 앞부분이 이해되는 경우가 있음에도 앞부분을 다 완성하고 넘어가려고 마음먹으면 어쩔 수 없이 암기할 수밖에 없는 과부하가 걸린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늘 처음 볼 때는 대충 보고, 여러번 시간간격을 두고 반복하라는 나의 성취에서 나온 조언을 자주 해준다. 물론 학생들마다 기질과 스타일이 다르니 받아들이는 건 본인의 선택으로 맡겨둔다. 


대학 3학년 말에 세 가지 시험을 준비하기로 다짐하고, 아버지께는 3개 다 수석을 노려보겠다고 했다.

왜 세 개나 준비하는지 궁금해하는 동기들에게는 하나라도 붙지 않으면 바로 군대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하나라도 얻어걸리라는 심정으로 준비한다고 했고, 그 당시에는 진심이었다.


임용고시 전공의 경우는 임용고시가 아직 충분히 정착되기 전이라서 무슨 책으로 공부해야 할지 막연했다. 난 전공시간에 배운 내용과 시험경향 등에 맞추어 서점의 원서를 찾아 공부할 교재 목록을 스스로 정해서 학습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그 목록을 넘겨주었다. 나의 자율성과 주도성이 발휘되었던 대목이다.


그리고 일반대학원과 교육대학원 모두 수석합격이었다. 임용고시도 그당시 있던 그 흔한 군가산점의 혜택도 없이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수석했다는 교육청 고위관리자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초기 목표를 다 이루었지만, 실제로 이뤄낼거라고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한 개라도 걸리길 간절히 바랐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바로 군대를 가는 일만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게 3관왕을 하고나니 학과 동기들에게 하나만 합격해도 감지덕지라고 하더니 완전 엄살이었다고 핀잔 섞인 축하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는 주도성을 찾아갔지만 인생의 항로에서 중대한 결정에 대한 주도성을 보장받지도, 스스로 찾아갈 생각도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지만 아버지가 반대하신다고 군대가는 일까지 대책없이 미뤄두었던 건 지금 생각하니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아마 장학생이면서 과외로 알바를 한 것을 집 생활비로 계속 보태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군대를 해결하지 못했고, 여전히 주말마다 집(교회)에 다녀와야 하고, 생활비 때문에 과외도 계속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절실함은 공부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그 불안함에 대한 멘탈관리가 된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교생 때 만났던 소중했던 학생들도 내겐 큰 동기와 의지가 되기도 했다.


재수할 때 선택의 여지없이 자기주도학습을 해야 했던 난, 대학교 4학년 때에도 그때 생긴 내공과 습관으로 그 공부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 비교대상도 가까이에 없던 그 상황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도 내게는 큰 힘이 되었고 본질적인 일상 지속의 이유가 되었다. 


난 일반 대학원을 선택했고(그 당시에는 수업시간을 조절해서 금요일 오후에 수업을 듣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교사로서 일반대학원은 불가능하다고 함. 야간에 수업이 진행되는 교육대학원은 가능) 학위나 학문 자체를 위한 공부는 내게 맞지 않다는 걸 확실히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교수님들과의 관계도 너무 힘들었다. 더구나 일반대학원이었기 때문에 우리 학과(사대영어교육과) 교수님이 아니라 영문과 교수님과의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게는 너무 힘겨웠다.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전혀 써먹을 일이 없는 심층적인 영어학과 영문학은 내게 무의미했다. 그저 학위만을 위해서 다녔던 것 같고, 학위 때문에 억지로 과정을 마쳤다. 박사과정을 권하는 교수님들의 권유에 전혀 고민이 되지도 않았다. 


이제 난 평생공부의 언저리에 있다. 나의 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블로그나 브런치는 내게 평생 공부의 플랫폼이기도 하다. 그 배움은 주로 독서를 통해 이뤄진다. 

과연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독서의 내공이 중요하다는 것을 평생 공부의 과정에서 실감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읽기를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배움은 자발적이야 하고 즐거움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 난 희망과 힐링을 주는 교사가 되려 애쓰고 있다. 물론 처방도 함께 주고 있다. 본인의 부족함을 느끼고 절실한 학생들에 한해서 유효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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