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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ug 13. 2023

기독교 관점에서 본 <마흔에 읽는 니체>

“신은 죽었다”로 대표되는 니체 철학의 핵심을 챗 GPT에게 간단하게 말해달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의지의 힘'과 '초인' 개념입니다. 의지의 힘은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강조하며, 모든 가치와 도덕이 인간의 의지에 기반한다는 생각입니다. 초인은 전통과 도덕을 초월하여 인간이 더 높은 수준의 존재로 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념입니다. 이를 통해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아 의지를 발휘하며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수업시간에 내가 자주 인용하는 아포리즘도 니체의 것이다.

Whatever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이 책은 니체의 철학을 심도 있게 분석한 책은 아니다. 니체의 철학을 바탕으로 작가의 생각을 담아 자기 자신이 실종된 채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은 40대를 겨냥하여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느낌이었다.

일단 난 40대를 넘었으므로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없었지만, 학교 교사 독서모임 책이라서 일독하였다.

 

읽는 내내 삶에 대한 위로가 아닌 약간의 불편함과 강한 비판의식이 차올랐다. 뭔가를 새롭게 배우고 깨닫게 되는 그동안의 독서와는 다르게, 어떻게 비판할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2학기에 있을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것 대신 서면으로 내 의견을 제출하려는 목적의식으로 완독했다.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는 저자의 해석대로 서양 철학의 근간으로 알려진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에 대한 저항과 독립을 의미한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이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고, 무의미하고 두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신이 결과적으로 인간을 더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저자는 (니체의 생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 구분되지 않지만) 기독교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현세와 내세로 세상을 이분화하였고, 현세는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이며 참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폄하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로 내세를 부정하며 현세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는 걸 강조한다.

 

기독교의 신은 만들어진 것이고,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라는 출발점으로 인해 더 나약한 존재가 되었으니 그 신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인간 본연의 가치와 강함과 초인정신과 의지를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지적인 것이다. 

기독교가 천국소망으로 인해 현생을 등한시하고 이 땅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묘사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니체가 아니라도 철학은 인간의 사고력과 상상력과 논리력을 극대화하여 인간의 존재와 삶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의미를 찾아가고 인간 사유와 행동에 대한 답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에 대해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많은 예술과 논리학, 문화, 그리고 문학 등에서 구체화되며 인간의 사유에 깊이를 더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철학의 과정은 때로는 정답을 찾지 못하는 좌절감을 동반한다.

과학도 인간의 한계 내에서만 입증 가능한 가능성과 현실의 조합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학문이 아닌가? 절대 진리라고 믿었던 사실에 기반한 이론들도 이후에 잘못되었음이 밝혀지는 것이 과학발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과정이었다.

 

철학도 인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니체가 초인으로서의 인간의 지향점을 말했지만, 주체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할 뿐, 문자 그대로 초능력을 지닌 어벤저스가 되거나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인간들 중에서는 우월할 수 있고, 더 발전한 존재적 가치를 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니, 그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난 철학의 깊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율법주의와 대비하여 생각해 보았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지키려는 인간적인 노력이 더 심화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두가 그랬다고 절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갖게 된 건, 우월감과 기득권적 생각이었다. 성경에서 예수님과 대립관계로 묘사된 것은, 그들 모두가 인간적 성취를 가진 기득권의 눈으로 봤을 때, 기득권이 없는 약자와 죄인들의 편에만 서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존재가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부러 약자와 죄인 편에만 서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찾은 것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을 뿐.

 

노력과 기득권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철학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도 고통 속에서 고민을 하면서 답을 찾으려 애썼기 때문에 그 노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에 담겨 있는 상대적 윤리주의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고 초인이 되는 과정에서 추구하는 행복과 의미를 찾는 과정에, 더불어 행복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철학을 다른 이들에게 강조하며 그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바리새인들의 가진 자들의 신앙처럼, 특히 니체의 철학은 강자와 기득권의 철학인 건 아닐지.

공부를 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강연을 통해 공부를 잘하고 싶은 갈급한 자들에게 외친다. 때로는 이것도 못하면 안 된다고 다그치기도 한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거나, 속도가 느린 학생들은 소위 가진 자의 철학과 조언에 더 큰 좌절과 무력감을 느낀다. 

 

니체는 낙타, 사자, 어린이 단계로 인간의 정신적 발전 과정을 제시했다. 

* 출처 : 챗 GPT

낙타 (Camel) 단계: 이 단계의 인간은 사회적 가치와 의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감당합니다. 책임을 부담하고 어려운 도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내적인 성장을 겪습니다.

사자 (Lion) 단계: 사자 단계의 인간은 낙타가 받아들인 가치와 의무에 대해 반항합니다. 전통적 가치와 도덕을 무너뜨리며 "아니"라고 외칩니다. 이를 통해 자유함과 독립을 추구하게 됩니다.

어린이 (Child) 단계: 이 단계에서 인간은 '자가 창조'의 상태를 경험합니다. 사자 단계에서 거부된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마음이 '무'로 돌아가 고유한 의지와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단계 중 가장 높은 것은 '어린이'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창조적인 삶을 이루어 내는 절정을 경험합니다. 니체의 '초인' 개념은 이 과정을 완성하고 넘어가는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올바른 가치 추구 과정이라 하더라도 그 명확한 단계 설정이 마치 계급처럼 아직 낮은 단계에 머물고 있는 자들의 상실감에 맞닿아 있다면, 그 철학은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상대평가적인 시스템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 더 높은 단계에 있다는 우월감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초인의 단계는 결국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와 도착점일 수도 없다.

 

게다가 철학, 율법주의, 공부가 성취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도달할 때까지의 대부분 과정은 좌절로 점철될 것이다.

 

니체 본인은 초인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삶은 행복했을 것인가? 평생 건강과 질병의 경계를 오갔고, 고통 속에서 초인의 의지를 발휘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그의 여정은 삶 자체로 보상받았을 것인가? 또 그 보상이 초인이 되었는지 여부로 결정되어야 할 것인가?

내세를 부정하고 이 땅에서의 삶만을 바라면서 아모르파티(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의 정신으로 생존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며 성취였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후세에 영향을 끼칠만한 자신만의 업적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다 이루지 못한 삶의 단계에서는 삶 자체를 부정당해야 할 것인가?

 

상 질병에 시달렸던 니체는 자신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건강한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만의 방식을 소개했다는데 이런 대목도 있었다.


간식도 먹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마라. 커피는 우울하게 만든다.

많은 것을 보지도, 듣지도, 자기에게 다가서도록 내버려 두지도 마라.


병약한 것도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금욕적으로 절제하는 삶 자체가 참다운 인간됨을 실현하는 절대기준이어야 하는가? 이걸 감내해야만 삶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모든 독서는 나의 휴식에 속한다.

 

그러니 이건 다름의 이야기다. 모두에게 독서가 휴식일 필요는 없고 니체의 조언을 따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더 나음보다 다름에 초점이 있다면 정답만 추구하는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한 하나의 처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니체의 철학이 제시하는 인간다운 모습과 지침을 다 지켜야 인간다움이 극대화되고 가치가 증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복음주의와 다소 대비되는 율법주의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겸손하라’, ‘거짓말하지 마라’등의 미덕이 절대적 가치로서 자신의 주인이었지만, 니체 철학은 기독교 교리의 밑바탕이 된 그런 초월적인 가치들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는 상대주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관점에서 재정비하여 위에서 예를 든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발휘하게 된다면, 자발성 면에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하는 가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건 나만의 비약일까?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말하는 아포리즘, 그의 철학은 참고가 될 만한 좋은 이야기도 있다는 정도이지, 모두가 추구해야 할 절대가치나 절대 선은 아님을 더 확실히 했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라는 확신만 들었다.

 

저자는 40대가 겪는 번아웃증후군에 대해 니체의 철학을 접목시킨다. 제대로 잘 된 인간은 욕망하므로 욕망을 억누르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욕망에 따라 직장을 그만두거나 바로 이직을 하라는 조언은 피한다.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하는 현업과 병행할 것을 권하면서, 저자 자신이 10년 동안 한 회사의 CEO로 바쁘게 일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왔고, 지적 탐구의 결과물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어 하고 싶은 일로서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고, 권태에 빠지기 쉬운 중년의 삶을 잘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신의 사례가 대부분의 40대에게 위로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CEO였기 때문에 더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독서라는 가치활동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노력으로 열린 길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적인 제안을 이어간다. 명상, 요가, 자전거, 수영, 춤, 골프, 등산 같은 운동으로 내면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본업과 생업에 대한 의미 부여가 아닌 말 그대로 워라밸에 대한 조언이다. 우리 삶의 가치를 그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40대의 생업을 고단하고 힘든 것으로 전제하고 있고 그런 책임과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욕망의 실현인 것인지 좀 혼란스러웠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라는 책에서는 행복보다 몰입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한다. 행복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이뤄가면서 의도하지 않게 성취했을 때 우연히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면, 몰입은 의도적으로 그 과정 중에서 극도의 행복감을 행복하다고 의식할 겨를도 없이 느끼는 적극적 행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실현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생업에 내몰린다. 

그러나 그런 절박함이 아니라도, 어떤 일이든 하는 것이 그저 하고 싶은 일만 취미처럼 하고 지내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감이 높았다는 통계가 <몰입>이라는 책에서 제시된다. 

지금 나의 일은 나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고, 어딘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미 부여가 있다면 고단하고 힘든 일이라도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진심과 최선을 다해 일한 후에 주어지는 휴식은 더 즐거울 것이다. 우리 삶은 욕망을 이루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늘 더 큰 욕망을 갈구하며 더 큰 자극을 바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더 감사하고 즐겁게 할 수 있다.

 

취미생활이 삶의 본질적 의미인 것인가? 

난 그저 소극적 삶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는 상황에 관계없는 평안함을 말한다.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어도 역량껏 성취의 즐거움을 누린다. 알려진 바와 다르게 기독교는 금욕주의와 율법주의만 강요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내세를 중시하지만, 그게 현세를 포기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보통의 기독교인들은 내세의 천국 이전에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이루며 산다. 나만의 천국이 아니라 더불어 천국을 이루려 섬기는 마음이 되려고, 그런 겸손한 자세를 갖추도록 기도하며 산다. 그리고 쾌락도 열심도 다 선물 같은 은혜다. 이 세상에서 그걸 누릴 자격도 권리도 다 갖추었다.

 

니체도 평생 고통스럽게 고민했던 현세의 괴로움은 어찌 보면 기독교가 아닌 철학이 지고 있는 짐처럼 느껴졌다. 현세의 괴로움을 내세의 천국소망으로 위로를 받고, 사랑하는 이들과 사별의 허망함도 잠시 터널을 지나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소망으로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의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중심을 지키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난 교사를 하면서 40대를 지나 50대에 이르렀지만, 또 그 과정이 절대 만만하거나 쉽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나 자신의 행복과 보람을 위한 목적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학생들과 더불어 누렸던 매 순간의 행복과 의미 있는 성장과 교감의 성취들로 인해 내 삶은 축복과 은혜의 연속이었다. 전통적인 가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적인 반항도, 나만의 가치를 재창출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니체의 철학에 정통하지 않았지만, 니체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뤄내며 한순간도 의미 없던 순간은 없었다. 실패와 실수조차도 성장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니, 그것도 역시 삶의 일부이며 숙명이라는 생각도 가졌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의 큰 그림으로 맞춰가는 퍼즐이라고 생각하니 그 자체로 모든 사소한 것에도 의미 부여가 되었던 것이다.

 

성장과 도달점은 열매다. 목표가 아니라. 그저 나뭇가지로 진심을 다해 자리를 지키다 보면 맺게 되는 결실인 것이다.

그러니 난 나의 열매에 집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누구보다 더 이뤄내야 하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각기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니 혹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약간의 우월감도 부질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완전한 삶의 의미를 찾고 거기서 온전한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철학은 우리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노력하게 해주는 도구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기독교 복음은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성장하는 것이니, 기득권이니 강자임을 주장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출발점에서 이미 감격스럽고(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애쓰지 않아도 사랑받는 것이니), 과정 자체가 의미 있고 행복하고 즐겁다. 이미 답을 찾았고, 혹 못 찾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며, 그 이후에는 은혜로 주어지는 삶이니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그 감격과 감동과 사랑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니체의 우연과 필연에 관한 이론도 기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세상은 목적과 의지의 영역과 우연의 영역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갑자기 지붕에서 벽돌이 떨어지듯이 우연한 사건이 우리의 목적과 의도의 세계로 떨어져 들어와 우리 삶의 아름다운 모든 목적을 없애 버린다. 이것이 우연이 필연이 되는 순간이다.

인생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편안함이 아니라 불안감이다. 

니체는 우연과 필연의 문제를 주사위 놀이에 비유한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사위 놀이가 우리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다. 주사위의 불확실성은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과도 같다. 결국 니체는 예측할 수 없는 일련의 우연한 사건을 두려워하지만 말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인은 주사위로 비유하는 니체의 우연을 신의 섭리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큰 계획 하에 이뤄지는 일이니,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궁극적으로 그분의 뜻이 이뤄질 것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감정은 거꾸로 불안감이 아니라 평안함이다. 우리는 우연도 운명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의미를 알 수 있게 되기를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이 책은 내게 도끼와 같은 책은 아니었다. 관점의 차이만 확인시켜주었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철학을 한 번 더 바라보게 해주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철학하는 것 같았다. 내가 초인이 되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젊은 날. 그러나 나의 한계를 확인하고, 나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고백하는 순간, 난 훨씬 더 강해졌고, 더 감사했고, 더 감격스러운 은혜 안에 거하게 되었다. 나의 젊은 날의 열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과 노력도 다 의미가 있다. 단, 지금은 그 열정과 노력의 참된 의미를 알면서 지낸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노력은, 그리고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은 그저 허망하게 혹은 무의미하게 허공에 흩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노력도 멈출 수 없다. 은혜를 겪었다고 안일하게 그 자리에 머물지는 않는다. 목표 지향적이어야만 더 힘을 낼 것 같지만, 난 이제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목표와 씨름하는 낭비보다, 그저 감격 속에서 은혜에 잠겨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성장을 조금씩 이뤄간다. 그리고 그 성장은 나의 욕망만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은혜로 흘러넘치는 축복이기를 기도하며 행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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