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공부는 두 가지 이유로 한다.
하고 싶거나 해야만 하니까. 즉, 재미있거나 필요해서.
물론 공부를 하다 보면 재미있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영상을 보거나 노는 것보다는 재미있을 리 없겠지.
필요해서 하는 경우라면 반드시 노력 대비 결과를 확인해야 의미 부여가 된다. 노력했는데 성적이 안 오르면 좌절하게 되고, 다시 도전하겠다는 용기를 내기가 어려워지지.
필요해서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공부를 한다는 건 성실함의 훈련이라고 볼 수 있다.
반드시 노력의 정도에 따라 한 줄로 세워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니, 타고난 능력과 다른 변수의 개입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꾸준하게 하게 되는 것이 학생으로서 해야 할 공부의 의미란다. 그리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감당하는 절제하는 훈련이기도 하지.
그걸 훈련하고 나면 공부 분야가 아니라도 될 거란다. 어떤 분야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본 준비를 갖추게 된 것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노력 대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계속해야 할 의미나 의욕을 찾지 못한다는 데 있다. 아직은 그저 편안하고 싶은 중3인 여러분들에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책임 같은 미션을 자꾸 잔소리처럼 얘기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중학교는 시험범위가 뚜렷하고, 그리 많지도 않아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알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노력한 것만큼 성적이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고등학교 가면 문법도 전 범위, 어휘도 학년 수준에 맞게 전 범위이니까, 이런 준비 없이는 시험공부 자체도 어렵다. 고등학교는 암기로 커버할 수 있는 범위도 아니란다.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올 거고, 아니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오기 전에 이미 수업이 이해가 잘 안될 거란다. 그런 상황에서 용기를 내서 끝까지 해보자고 마음먹기가 너무 어려워지지.
그래서 지금 조금이라도 더 준비해두어야 하는 거다.
예전에 영어, 수학 수준별 수업할 때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을 모아서 수업했지만, C반 학생이 A, B반으로 올라가는 일은 드물었다. 반 편성이 되는 순간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그런 무력감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리더 같은 학생들을 A반이 아닌 경우에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었지.
둘째 딸이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치를 때마다 울면서 서울의 명문대 갈 수 있는지 물었었는데 그럴 때마다 가능하다고 근거를 얘기하고 격려하고 코치했기 때문에 딸은 끝까지 갈 수 있었단다. 수능 직전의 모의고사에서 처음으로 증명이 되었고, 수능이 잘 안 나왔어도 그 성취에 대한 기억으로 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재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지.
그런데 앞으로 여러분들이 처할 상황은 현실이, 주변 상황이, 그리고 스스로도 끊임없이 안 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을 거다.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 마음 편할 정도로.
그럴 때 주변의 코칭과 현실적인 격려도 필요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중요한 건 성취의 기억이다.
스카이 대학 학생들의 취업이 잘 되는 것은, 실력도 물론 있겠지만 그 대학 진학으로 증명해낸 성취의 기억 때문이다. 그 기억으로 인해 뭐라도 도전할 용기를 갖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성취 기억은? 중학교 때 한 과목이라도 잘했다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성취지만 그보다 매일 일상에서의 사소한 성취의 기억을 하나하나 몸에 새기면 좋겠다. 평소 안 보던 단어를 몇 개 더 봤고, 수학 문제를 몇 개 더 풀었다는 노력으로 가능해진 변화, 그것 자체가 성취라는 것을 인정하면 끊임없이 노력할 의욕도, 동기도, 명분도, 이유도 다 얻을 수 있다. 그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니 변수나 결과의 불안함에서도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을 거구.
그 대신 자신의 수준에 맞는 출발점과 속도를 지켜야 한다. 어설프게 남을 따라 하다 보면 몇 걸음 내딛지 않아서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그리고 공부를 좋아서 하는 경우라도, 보통은 필요에 의한 공부에 묻히기도 한다.
보통 대학 합격컷은 취업순이란다.
예를 들어 공대와 자연과학 대학 중 보통 합격 컷이 더 높은 곳은 공대다.
큰 딸이 물리가 좋아서 공대 기계공학과를 갔다. 그러나 딸이 원한 건 물리학이 추구하는 순수한 호기심 충족이었다. 그러나 기계공학은 원리보다 현실과 기술에 적용하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딸은 그 공부를 재미없어 했다. 그래도 필요하니까 하긴 해야 했지.
그러다가 물리학과 복수전공을 고민하며 물리학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공대가 아닌 물리학과를 진학할 용기는 없었을 거라고 하면서, 공대를 걸쳐놓고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만족해하는 거였다.
얼마 전 물리학과 학생들과 교수님이 모여서 개인적인 담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대학생활 중 제일 재미있었다고 했다. 소위 물리 덕후들이 모이면 이런 대화가 오간다고 한다.
야구선수와 권투선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에 대해서, 야구 방망이를 휘두를 때의 모멘텀과 속도 가속도를 계산하고, 권투선수의 반응속도 등을 따져서 토론을 한다고.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넘어졌을 때 누구 머리가 깨지 확률이 높은지를 계산하기도 한다고.
남들은 궁금해하지도 않는 일들을 일상생활에서 찾아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소위 nerd의 세계지만, 그렇게 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들이 얼마나 설레고 재미있는 일인지 실감했다고.
그러나 그 순수한 호기심과 배움의 과정이 취업이라는 현실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딸은 해야만 하는 기계공학 공부와 하고 싶은 순수물리 공부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는 중인 거지.
딸은 그렇게 대학 가서도 자신의 진로를 헤매면서 찾아가는 중이다. 그러니 중학교, 고등학교 때 자신의 진로를 정확하게 알기 힘든 것도 당연한 일일 수 있는 거다. 재미있는 게 없다면 그나마 덜 싫은 걸 통해, 하고 싶은 것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정답처럼 정해진 것은 없으니 그냥 근처에라도 가 있으면 기회는 늘 있을 거다.
필요한 공부를 하는 건 현실이지만, 때로는 하고 싶은 공부를 추구하는 자유를 통해 얼마든 다양한 가능성에서 인생의 진로를 탐색할 수도 있다.
필요한 공부만 생각하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공부는 자신을 위해서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신만의 세계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웹툰 작가가 되려는 제자에게 반드시 바로 예고 가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웹툰은 기술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인데, 상관없어 보이는 공부, 다양한 체험, 심지어 실패의 경험으로 우러나는 것이니까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다른 이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배움은, 내가 하는 일에서도 진심이 우러나면서 상대방의 감성과 마음을 움직이는 결과를 가져오니까.
또 순수한 배움의 자세는 겸손함과 남을 존중하는 데서 나온다.
딸이 만났던 물리학과 교수님은 유명하고 바쁜 분인데 학생들과의 그런 만남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겸손함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물리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물리 안에만 갇히지 않으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 교수님은 학생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할 때 오히려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같이 알아보자고 한다는데, 그게 진정한 배움의 자세인 거다.
그게 공부해야 할 이유다.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아직 못 찾았더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때로는 하기 싫어도 절제하고 성실하게 그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뤄가기 위해서... 그런 시행착오 같은 과정에서, 성장의 기쁨과 행복까지도 놓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의 꿈을 단번에가 아니라 조금씩 완성해 갈 거다.
확실한 건, 아는 만큼 보이고,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 출발이 막연하고 답답해도 일단 시작하면 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더라.
그리고 혹 뒤늦게 시작해서 남들보다 뒤처진 것에 대해서 너무 안타까워하지는 마라.
남들이 애쓴 노력의 축적과 깊이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 대신 앞으로 각자의 길을 가되, 더 효율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노력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니, 언제든 선생님께 기대렴. 도와줄게. 공부의 과정에 그런 멘탈 코칭도 필요할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