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대학 영어교육과 교수님의 독해지도법 온라인 연수를 들었다.
전문성이 뿜어져 나오는 연수 내용에 의기소침해졌다.
난 25년 이상 영어교사로서 이론과 전문성에 충실하지 못한 교육을 해온 것인가? 순간 그동안의 나의 교사로서의 교육활동이 부정될 위기에서 생각이 깊어졌다.
부정된 채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거나,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비판을 하면서 방어할 것인가?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다짐한 것은 더 이상은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론적 바탕으로 더 잘 가르치고 준비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내용 자체에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기저에는 내 스스로 가질 수 없었던 흥미에 대한 변명이 자리하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가르치고 싶은 내용만 내 멋대로 가르치면서도 경력직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던 것일지...
최근 교육대학원 예비교사 특강과 멘토링을 통해 그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전문성으로 무장한 교수님의 무대에서 그냥 현장에만 익숙한 현직교사인 나를 만났다.
혼란으로 끝날 것인지, 현실과의 조화로운 성장과 발전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인지... 나도 확신은 없다.
적어도 나는 이론을 분명 배웠고 그게 교직 준비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게 내재화되었는지 잊혔는지는 의식하지 못한 채 매일 학생들만 만난다.
내재적 지식이란 의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지식을 말한다.
나의 티칭이 어떤 영향을 받았던, 어떤 경험을 축적했던 결국 내재적 지식처럼 일상에서 드러나고 있을 텐데 그 영향력의 끝에 대학 때 배웠던 전문적인 티칭 이론과 원서의 내용들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분리해 내기는 매우 어렵다. 실은 그걸 분리할 이유도 의미도 찾지 못했다.
연수를 듣고 나서 그동안 잠재워 두었던 것들을 꺼내 들었다.
지금은 현장 경험으로 채워진 내게, 그 전문성을 갖춘 내용들이 여전히 멀고 높고 어렵게 느껴졌다. 대학 때는 오히려 그것이 일상처럼 편한 배움의 과정이었고, 현장에서 가르치는 것을 상상하며 설레는 기회가 되었겠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이론이 닿지 않는 아이들의 수준과 기질 등의 개별성이 떠올랐다.
연애 이론에 능통하다고 실제 연애를 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 인기 영역으로 자리 잡은 리얼 연애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하며 대리만족을 하기도 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배우기도 한다. 사랑도 연애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혼과 자녀양육은 분명 배워야 할 감정이며 영역이다. 이론에 능통하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론으로 충분하다면 사범대나 교육대학원생들이 교생실습을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수님들은 주로 대학생들만을 학생으로 만난다. 혼자서 이론을 연구하고 전문가가 되었고, 그걸 대학생들에게 적용한다.
지금 합격컷이 많이 추락했다고는 하나, 사범대생들은 보통 우수한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교사가 되기 위해 더 큰 관문을 통과해야 해서 미완성인 느낌은 있지만, 적어도 중고등학교 입시 경쟁에서 나름의 성취로 살아남은 학생들이다. 기본적인 학업능력, 그 이상을 갖춘 학생들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나는 건 관문을 통과하기 전의 학생들이다. 그중에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예견되는 아이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모두 그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테솔연수에서도 교수님들의 리딩지도법에서도 다독을 강조 받았다.
교수님의 강의 내용 중 다독이 중요하다는 건 스키마이론 형성에 비추어 볼 때 지당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파닉스조차 안 되어 있고, 기본적인 단어나 문장구성원리를 모르는 학생들이 다수를 이루는 중고등학교 현장에서 현실적인 방향일지는 잘 모르겠다. 문장은커녕 단어 하나도 제대로 읽지도,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독으로 이끌 것인가?
단어는 문장 내에서 학습해야 한다는 이론도 찬성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단어의 문턱을 넘지 못한 학생들은 어쩔 것인가?
문법이나 문장구조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스키마를 활용하는 학생들의 우수성을 더 강조한다면, 주어, 동사, 수식어의 경계에서 헤매는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쩔 것인가?
언젠가 한국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한 교수님의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컴퓨터가 채점하는 대입시험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했다. 미국의 SAT는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평가 자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학교 수업이 부정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분들은 치열하게 삶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기본적인 문해력을 갖추지 못해 힘겨워하고, 사소한 습관부터 지속적인 자율성과 자기주도성을 키우기 위해 애를 쓰는 학생들을 현장에서 만나보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 아이들을 최전선에서 만나는 교사들의 일상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는지 묻고 싶다.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당대에서는 그 시스템 안에서 배움의 성장을 이루도록 도우며, 인성과 사회성을 골고루 길러줘야 하는 교사의 막중한 책임을 보고 있다면, 한국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는 단정적인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교육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아니고, 개선의 여지도 많고 혁명에 가까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 교육에 대한 부정은 그 교육의 주체인 학생과 교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속이 막 후벼파지는 느낌이었다.
현장경험이 없는 탁상공론은 때로 현장을 황폐화시킨다. 이론,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난 글의 방향을 정하지 않고 시작했지만, 나 스스로를 변호하고 방어하는 쪽으로 글의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예상했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다. 설령 나의 방법이 서툴렀고, 부족함이 많았더라도 학생들을 향한 마음은 모두 진심이었고, 나의 노력도 헌신에 가까운 애씀이었다는 것으로 자기변호의 권리를 얻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꼰대 인증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다른 이론을 받아들일 마음이 안 되어 있다는...
그러나 연수로 접한 이론들은 대학교 때의 분위기나 테솔 연수와 차이가 없었다.
나도 변해야 하고 개혁 같은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전문가들의 이상적인 이론이 현장의 치열한 현실과 만나 긍정적이면서 균형 잡힌 교육성과를 기대해 보고 싶다.
그러고 교육대학원 예비 교사들을 만나 교육을 논했다.
현장에서는 매시간 지도안을 쓰지 않으며, 학기마다 제출하는 지도안도 약식으로 제출하는 경우도 많다고 솔직히 얘기했다.
그러나 지도안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지도안 작성에 대한 훈련을 치열하게 받고 나서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처음부터 현장에서 잘 쓰이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배우려 하지 않거나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창의성이나 비판적 사고나, 배려하는 인간상이나 민주 시민의 역량도 당장의 교육으로 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해 보이는 기본적인 학습과 태도나 마음자세를 가르치는 인성 및 생활지도의 반복과 노력으로 그런 역량을 발휘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전문가처럼 발휘되는 능력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면 일상 같은 사소하지만 더 중요한 교육활동에 대해 둔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학생들은 이미 그 과정을 다 거쳐서 그 자리에 서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결론으로 바로 드러나는 성과를 강조하는 것은 사교육 시장의 동력이기도 하다.
준비된 학생에게서 역량을 끌어내는 교육도 수월성교육이라는 명분으로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준비되기까지 전쟁 같은 치열한 과정을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겪어내야 한다. 교육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씨를 뿌리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이 좋으면 열매가 맺히는 걸 간신히 볼 수도 있을 뿐.
그리고 때로는 시작할 때 형식을 강조할 수도 있다. 충분히 훈련을 마치고는 유연해지고 융통성을 갖출 수 있지만, 시작은 형식과 틀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의 영역이고 역할이다.
예비교사들에게 강조했다. 시작은 치열하고 힘겨워야 한다고. 문턱을 넘는 고통이 이후의 편안한 궤도의 진입을 보장한다는 건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교육대학원 예비교사들 멘토링을 하는 카페에 놀랍게도 담당 교수님이 먼저 오셔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계셨다. 사비로 음료와 간식을 주문해 주시고 인증샷을 찍고 가셨다.
잠시 학생들은 전문가인 교수님과 현장 경험만 가득한 현직교사를 같은 공간에서 모순처럼 마주했다. 난 양극단이라는 표현까지 했다. 분명 대학원에서 배우는 전문적인 내용이 필요하며, 그 깊이에서 시작된 고민이 내재된 지식처럼 선생님들의 교육방향을 가치관처럼 형성해 줄 거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현직교사인 나를 통해 분명 다른 극단의 현실도 마주하며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행복하실 것을 당부했다. 교사는 지식만 전달하거나, 이론에 충실해서 원칙대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본인의 삶으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 대신 대학원에서 배우는 전문성에, 평소 어휘와 문법과 문장구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체계가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전달될 수 있게 축적되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그래야 teaching material을 마주했을 때 자신만의 내용구성이 가능하다고.
가장 중요한 것을 선별하고 하나를 가르치면 더 널리 응용할 수 있는 원리와 이해 중심의 학습 내용을 구성하고, 이왕이면 선생님들의 삶에서 스토리를 입은 재미있는 컨텐츠가 입혀지고, 감성까지 담으면 그 자체로 작품 같은 수업이 탄생하는 거라고.
우리는 매 순간 그런 작품을 만드는 존재라고.
전문적 이론의 뒷받침 없는 비전문가의 삶의 체험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앞날을 확신할 수 없는 학생들의 불안감이 전혀 없던 건 아니지만, 난 그들에게서 다양한 가능성과 시행착오를 겪고서라도 결국에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다. 나의 교육경험을 그들의 젊음의 에너지, 그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리액션으로 받게 된 감격스러움, 감동과 맞바꾸었다.
그러면서 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다 받아들이지 말 것도 당부했다. 그저 선생님들이 만들어 가는 성장의 과정에 잠시라도 머문 미미한 영향으로만 남게 되길 소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