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말하는 꿈과 문학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어령님을 규정하는 정체성이 무척 많지만, 난 그에게서 시대의 지성으로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한 C.S. 루이스를 본다. 그의 많은 저서 중 회심의 내용을 담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
이 책은 <모리와의 화요일>을 닮았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인터뷰를 담고 있어, 그 깊이와 울림이 엄청나다.
그 깊은 책의 내용 중 두 부분만 발췌하여 내 느낌을 더해보려 한다.
<꿈을 살아낸다는 것>
프로세스!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나는 멈추지 않았네. 집에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녔어.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상식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어.
이런 역설을 모르면 인생 헛산 거라니까.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내가 왜 남은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겠나?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네.
나무위키에서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소설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육자, 사회기관단체인, 관료이자 정치인으로서 노태우 정부의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으며 소설가, 시인이자 수필에 희곡까지 써낸 작가 그리고 기호학자이다.
그는 또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 소년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굴렁쇠를 굴리는 그 장면을 기획했다.
이어령님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을 총괄 기획했다. 종전에 있었던 모스크바 올림픽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냉전의 여파로 한쪽 진영이 불참하는 불상사를 초래한 데 반해 서울 올림픽은 모든 진영이 참가하면서 화해의 장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어령은 당시 '화합과 전진'이라는 다소 딱딱한 느낌의 문장을 바꿔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를 만들어내어 주제의식과 역동성을 모두 표현해낸 명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막식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 역시 이어령의 기획이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던 단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아주 평화로운 정적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그것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의 개최지 선정을 선언한 바로 그날 태어난 아이였다)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 중앙을 사선으로 지나가는 모습은 전쟁고아의 이미지에 불과했던 한국의 인상을 새롭게 바꾸어놓겠다는 계획의 소산이었다. 거기다가 여백의 미를 살린 전통적인 문법도 있는 것이었다. 이어령은 이후 인터뷰에서 "왜 문학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기도 하는데, 원고지에 쓰던 것을 잠실 주경기장으로 옮긴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이것을 시로 쓰면 1행시가 될 것이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한 분야에 안주하지 않고, 세월에 맞서서 평생 꿈을 꾸며, 그 꿈을 삶으로 언어화한 듯하다.
각자의 꿈을 끝까지 살아내라는 격려와 당부로 들렸다.
<질문과 문학>
꿀벌 장수가 글 쓰는 것에 대해 물어보려고 그를 찾아왔다. 그러면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그의 반응은 이랬다.
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고.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 한다고. 그런 추상적인 질문은 무모하다고.
그러면서 아래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질문이 너무 커. 책 한 권으로도 담을 수 없는 큰 것을 내게 물어본다네. 평생 공부하고 써야 할 것을, 나한테 물어본다구.
그럴 땐 할 수 없이 그것을 작은 이야기로 쪼개서 알기 쉽게 이야기하지. 안타까운 것은 듣는 자들이 그 디테일은 다 빼버리고 결론만 떼어서 전해버린다는 거네. 그러면 어떻게 되겠나? 하나 마나 한 일반론이 돼버려. 가령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자기 인생을 살라고 하더라’. 뻔한 얘기가 넘치는 세상에 내가 일반론을 보탤 이유가 없네.
꿀벌 장수에게 물었지.
‘당신이 가장 잘 아는 게 뭔가?’
‘꿀벌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꿀벌을 잘 봐. 꿀벌처럼만 하면 좋은 문학이 돼.’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작은 질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작은 질문은 세밀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말한다. 질문에 가장 잘 대답하는 챗 GPT에게도 구체적인 질문을 할수록 더 훌륭한 대답을 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작은 질문에는 고민의 길이와 깊이가 담겨있다. 챗 GPT 시대에 질문을 잘 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어령작가의 통찰력과 깊이에 놀랐다. 꿀벌 장수 이야기를 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을 바로 떠올려서 대답하는 건, 지금 당장 필요한 자료를 리서치해서 간신히 대답을 이어가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의 삶과, 독서와 간접체험들이 축적되어 있다가 마중물을 만나면 바로 길어올리는 그런 수준이었다. 인풋의 중요성을 느끼며, 문학의 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그만의 답변에 감탄했다.
문학도, 글쓰기도, 우리의 삶은 거창하지 않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는 걸... 그러니 우리는 문학을 살고 있고, 그런 축복된 삶을 살고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일 것이다.
물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글을 남기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을 매 순간 의식하게 하는 축복의 의식이 될 것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