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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즌에 받은 학생 손편지

by 청블리쌤

스승의 날에 선물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된 문화는 바람직하다. 선물을 받던 시절에도, 난 학생들의 편지에 더 행복했다.

스승의 날은 평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던 선생님들께 발렌타인이나 성탄절의 고백처럼 학생들에게 용기를 갖게 해주는 날인 것 같다.


그런데 시즌도 아닌데 고등학교 설명회 홍보대사로 모교를 찾아온 졸업생으로부터 손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받는 순간, 아니 그 제자를 보는 순간 벌써 감동이 시작되었다. 존재 자체로 감동인 그런 제자였다.


편지에는 반가움과 오래간만에 모교에 와서 나를 만나는 설렘도, 기쁜 소식도 담겨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에 성적이 잘 안 나와서, 스승의 날 학교에 찾아왔을 때는 아픔을 나누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었는데...


치열한 경쟁을 하는 높은 수준의 선지원고에 진학해서도 중학교 때 자신의 성적을 기말부터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고 2학기에 들어서는 거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공부법을 찾아가고 있다는 자신감과 계속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다짐도 전했다.


내년에 내가 학교를 떠나도 지구 끝까지 찾아갈 거라는 애교 섞인 정겨움도 담겨 있었다.


늘 덕분에 힘을 얻고 감사한 마음이라면서... 최고의 선생님이라는 찬사를 쏟아부었다.


중학교에와서 고등학교 때만큼 나의 간절함과 열정이 아이들에게 가닿지 못하여 공허함과 허전함을 느끼면서 무력해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지쳐 방전되어 가는 나를 고속충전시켜준 편지였다.


매 순간 교육의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무기력과 무의미한 순간들로 힘을 잃어가더라도 교사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의 존재감으로 의미를 찾고, 학생의 절실함과 만날 때 열정을 충전한다.


그러려면 단 한 명의 제자라도 충분한데 이 제자는 내게 그 이상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편지를 읽자마자 바로 답장을 썼다. 그리고 설명회 끝나기 전, 제자에게 편지를 직접 전해주었다.


그 편지의 전문..


너를 볼 때마다 애절하고 애틋하고... 왜 그런지 모르겠다. 너의 절실함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하구나.


**고 선배들이 온다면 당연히 너도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단다. 5월 이후 얼굴은 못 봤지만 너의 존재감과 마음 깊은 곳의 응원은 여전히 가득 차오르고 있단다.


손편지까지 준비해 주니... 눈물이 막 날려고 한다.


연락을 실제로 하고 안 하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단다. 이렇게 나를 기억해 주고, 나의 응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제자의 존재감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끊임없는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축복 같은 감사를 누릴 수 있거든.


초반에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은 것이 나도 무척 안타까웠지만, 이렇게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너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어서 너무 기쁘고 뿌듯하다. 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되어 기분 좋고.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고 같은 선지원고에서 중간고사의 아쉬움을 딛고 기말에 바로 성적을 올리고 다음 중간고사에서 이렇게까지 성적을 극적으로 올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전교 등수가 이제 좀 너와 제법 어울려져 간다는 생각도 드네.


결과로 증명한 것도 너무 기쁘지만, 이렇게 올라서기까지 너가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그리고 그 불안감과 좌절을 올라서서 끝까지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너에게 제자로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후에 얻게 될 너의 성취는 보너스와 덤 같은 기쁨이겠지.


너에게 바라는 건 꼭 1등은 아니란다. 1등 하면 누구보다 기뻐할 자신이 있지만, 아니라도 되니, 너의 노력의 가치와 의미를 믿으렴. 지금 이 순간 알아가는 즐거움과 배움의 기회를 누리고.


때로는 이렇게 성과로 증명을 받아야만 연료가 공급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순간에도 너의 멈추지 않을 배움의 성장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고 기대하고 응원할게.


기말고사뿐 아니라 이후의 너의 모든 걸음에 나의 응원의 기운이 가닿기를...


내년까지 이 학교에 있을 거란다. 나중에 시간 되면 학교로 오지 않아도 밥 한 번 사줄게.

...


너로부터 듣는 교사로서의 최고의 찬사가 내 마음을 계속 울리는구나. 너의 그리움의 고운 마음씨조차 감동이다.


너의 절실함, 그 이상으로 너의 꿈이 펼쳐지길.. 희망이 가득한 너의 미래를 그려보면서도, 지금 이 순간 단 하나의 행복도 놓치지 않기를...


언제든 연락하렴. 늘 고맙고... 그립다^^


2023.11.22. 너의 편지를 받자마자 울컥해서 바로 편지를 쓴 청블리쌤이



내게 선물 같은 하루를 선사한 그날 밤, 제자는 편지를 읽고 내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편지 잘 읽었어요. 감동이에요. 저 울어요ㅠㅠ 내년에도 학교에 계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가시는 줄 알았어요ㅠ_ㅠ 시험 끝나고 또 연락할게여!!!!! 최고의 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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