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없는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자세

by 청블리쌤

학교에서 선배선생님 한 분이 담임선생님께 무례하게 대하는 학생을 보면서 내게 씁쓸한 마음을 공유하셨다.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도 예의 없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없고 참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검사"와 같은 마음이니, 교육에서는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마인드의 교사를 만나지 않으면 학생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떤 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건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못할 것이며 인격적인 성장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니까.


교사마다 검사나 변호사 마인드의 정도가 다르니 학생들은 어떤 유형의 선생님을 만나도 어떻게든 성장할 것이라고.


그러니까 선배쌤이 내게 예의 없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교육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학생들을 어떻게 참아내냐고 내게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린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태복음 10:14)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에 제자들을 보내실 때 하셨던 말씀이다.


성경 말씀처럼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했다. 교사로서 우리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 성과나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는 조급해하지도, 모든 것을 다 책임지고 만들어낼 것처럼 착각하지도 않는다고.


먼지를 떨어 버린다는 것은 저주나 포기의 의미가 아니며, 결과로 보장받지 못했다고 과정 자체의 의미가 부정되지 않을 것이며, 그 학생의 변화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닐 수도 있고, 꼭 나를 통해서만 교육이 일어나지 않아도 다른 분들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라고.


결과까지 책임지려하며 감정을 앞세우면 정당한 교육적 훈계를 하더라도 민원이 발생하기도 하더라고.


나로부터 나오는 교육적 개입을 원하지 않을 때는 타협할 수 없는 최소한의 의무와 책임만 지키면서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그러니까 선배쌤은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대목에서 크게 의미 부여가 되신 듯했다.


거기서 몇 마디 덧붙였다. 학생들 이해의 폭은 딸들이 넓혀주었다고. 학교에서 벌점이 쌓아셔 벌점 차감활동하는 걸 지켜보면서, 이미 내가 정한 타이밍에 나의 기준에 맞는 교육적 성과를 강요할 수 없음을 이미 받아들였다고.



그러면서 나의 교육관은 다소 비겁한 방식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비장하지 않은 기다림으로 점철된 방식이라고... 그러나 방임이나 포기는 아니라고.


요즘 모든 내신성적이 완료된 중3 수업을 하면서 매 순간 도전에 직면한다.


대놓고 학원숙제를 하려는 학생들, 대놓고 엎어지는 학생들, 좀비처럼 수업시간에 있으나 없는 학생들, 꿈나라와 현실을 오가는 학생들을 마주해야 하니까.​​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인지, 내가 억지로 집중시키려고 해도 학생 각자의 수업 안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라면 그냥 그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명분을 생각해서인지...


이제는 수업 들을 학생들에게만 학습지를 나눠준다.


내 수업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확신하지만, 당장 학원 숙제가 급하거나 내 수업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학생들을 모두 설득해서 데려가기에는 내게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고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시작할 때부터 마음의 정리를 하는지도 모른다.


수업 안 들을 자유도 인정해 주는 것이지만 수업을 듣겠다고 의사 표현을 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학습지는 수업의 티켓 같은 권리와 책임에 대한 실물 증거 같은 효력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많은 학생들이 내 학습지를 받아주었다.


선생님이 수업하면 무조건 다 들어야 되고, 절대 졸아서는 안 되며, 집중하기를 강요할 수 있었던 예전과 상황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학생들에게 교사의 수업을 안 들을 선택할 자유가 행정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교사들은 안일하게 수업준비를 하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님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선택받지 못하고, 바로 경력 유지의 도전을 받게 되는 사교육 선생님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다소 경각심이 필요할 수도 있다.


중1 학생들도 자유주제선택시간에 한 번씩 만나지만, 난 중학교에 와서 중3 수업만 3년 연속으로 하면서 여전히 고등학교 교사로서의 정체성과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학생들에게 맞춰주지 못하고 어차피 고등학교 가면 적응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나에게 맞춰줄 것을 강요한 것은 아닌지...


중1 수업을 실제로 해봐야 눈높이를 확 맞춰서 중학교에 맞는 컨텐츠 구성이 가능하지는 않을지...


올해 맡은 아이들을 떠나보낼 때가 되어서 더 생각이 많아진다.

그들에게 난 유의미한 교육적 성장에 조금이라도 기여했던 것인지...


교사나 부모는 기다림이 숙명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된 것 같다. 기다려준다는 것은 참아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장 감정적인 소모가 되고 상처를 받아도 한결같은 애정으로 응원의 마음을 담아 진심을 다해 전하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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