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번역:황석희>책을 읽다 3

by 청블리쌤

<영화 번역가는 자막 봐요?>

영화를 번역할 땐 자막이 없는 상태의 영화를 쭉 한번 봐야 해서 어쨌건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사를 듣는다. 이땐 영어 대사를 듣는 행위가 작업의 일부라 엄연한 노동이다. 내게 맡겨진 일을 할 땐 당연히 노동을 해야 하겠지만 그저 영화를 즐기러 갔을 땐 최대한 노동을 피하고 싶다. 쉬는 시간까지 자막 없는 영화를 보고 싶진 않다. 정확히 말하면 자막 없이는 외국어 영화를 아예 보지 않는다. 이미 누군가 공들여 만들어준 자막이 있는데 굳이 그걸 안 보고 노동처럼 영어만 듣다 올 필요가 있나.


번역가님보다 실용영어 비전문가인 나도 영어교사라는 신분(?)으로 자막 없이 영화를 보냐는 질문을 듣기도 한다. 다 알아들어야 본전인 다른 이들의 기대감과 시선이 따갑다.

번역가님의 솔직함이 큰 위로가 되었다. 영어교사는 자막 없이 영화를 봐야 신분에 충실할 거라는 생각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알아듣고 다 해석이 되어도 외국어인 거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영어 전공자라도 공부의 순간이 아니라면 우리말로 봐야 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영화 번역가를 그만두는 꿈을 꿨다>

다른 직배사들과는 일해본 적이 없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회사별로 선호하는 스타일의 번역가가 있어서 번역가가 바뀌는 일은 극히 드무니까.

... 결과적으로 평년에 비해 영화 번역 작업량이 많이 떨어지는데 희한하게 다른 쪽 일은 자꾸 많아진다.

...

손가락 관절이든 시력이든 청력이든 노화로 물리적인 문제가 생겨서 영화 번역가를 그만두는 게 꿈이지만 요즘 같아선 안 이루어지려나 싶다...

영화 번역가라는 직책을 떼고 자기소개할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그날이 아주아주 천천히 오기를...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진심이 전해졌다. 상황 자체가 너무 어려워져서, 본인이 계속 일하고 싶은 의지도, 여러 여건도 갖춰졌는데도 반강제로 은퇴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노화의 과정 자체와 정해진 퇴직의 기간이 두려운 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좋아하는 일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통했다.

사교육 시장에서 강사기 선택을 받듯이, 번역가도 이미 형성된 직배사와 번역가 사이에 새롭게 끼어들 여지는 커 보이지 않은 현실도 크게 와닿았다.

공교육 교사로 그런 절실함과 경쟁의 현실을 외면당한 채 살았다는 부끄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절실함을 회복하고 싶다. 애초부터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번역가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

영화 번역가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내가 번역한 영화를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 줄 때”가 아니라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 주는 영화를 내가 번역했을 때”다.


교사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내가 학생들의 열정을 이끌어낼 때”가 아니라 “학생들의 열정을 운 좋게 만났을 때”다. 나의 열정과 노력과 능력으로 학생들이 변화되고 있다는 착각보다 내 한계에 대한 인정은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만남의 순간에 감사하며, 감정노동과 같은 숙명적인 기다림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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