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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의 중요성(Feat. 큰 딸과의 대화)

by 청블리쌤

리처드 파인만 관련 물리 수업을 이번 학기에 수강하려고 설레는 큰딸과 대화를 나누었다. 파인만은 저서로도 유명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창의적인 전개로 물리 강의를 진행한 것으로도 유명한 물리학자였다고 하길래, 큰딸과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딸은 사교육을 안 받아서인지, 정형화되지 않은 참신하고 창의적인 풀이로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풀이가 쌈빡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난 예측 불가한 것에 재미로 반응하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 세계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까꿍”놀이인 것 같다고.


오래간만에 어린 조카를 만나서 같이 놀다가 까꿍놀이를 하니 조카는 오열하듯 웃었다.


분명 큰아빠가 자신을 놀래킬 것을 확신하고 있는데, 그때가 언제인지 계속 긴장하면서 기다리는 매 순간이 너무 설레고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5초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면 이내 예측 가능성으로 기대감도 재미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도박에 빠지는 것도, 드라마 다음 편이 궁금해지는 것도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의 궁금함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도 “까꿍”놀이를 다른 식으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취침시간, 기상시간, 식사 시간 등 삶의 거의 모든 패턴이 루틴으로 이루어진 아빠의 일상에 비해,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잠이 오면 자고, 재미있으면 깨어 있고, 배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식사 시간이 되어도 미루기도 하는 딸의 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아빠가 루틴을 유지하는 것은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곳에 쏟게 되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거라고. 잡스와 저커버거가 똑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으며 시간과 고민을 덜어내는 것처럼.


실제로 학교에서도 내가 잘할 수 없는 부분은 과감히 포기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그런 패턴과 맞닿아 있다.


큰딸은 자신의 생활이 예측불가하게 이뤄지는 것이 지루하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창의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전문가로부터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역량을 발휘할 분야를 제외하고는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했다.


그래서 내가 반응했다. 너의 예측 불가의 일상이 오히려 너의 창의성을 막아서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딸은 습관을 들이는 것에 대해 습관이 들기까지 의지가 작용을 해야 하는 것이니 너무 어려울 거라고 했다. 의지를 갖기도 힘들지만, 그걸 지속하는 것은 더 힘들다고...


그래서 내가 최근에 블로그에도 인용했던 책의 원제를 언급했다. <Outsmart Your Brain> 번역 제목은 <공부하고 있다는 착각>


https://m.blog.naver.com/chungvelysam/223238677183


뇌를 속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조금씩 하는 것이 지속성의 출발이라고. 그러니 시작은 반드시 찌질하고 사소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딸도 설거지하기 귀찮지만 일단 그릇 하나만 닦자고 시작하면 다 하게 되더라는 경험을 얘기했다.



나는 <습관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운동을 시작하려면 푸시업 한 번으로 시작해야 뇌를 속이면서 습관으로 정착한다는 내용도 인용했다.



그러고 보니 두 딸들은 집에서 지낼 때 혼공의 루틴을 정했었다. 적어도 집에서는 공부를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루틴 ㅋㅋㅋ


독서실이든 스카(스터디카페)든 카페든 집을 나서면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집 밖을 나서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집을 떠나면 공부하게 될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나이키 광고도 언급했다. 오늘 조깅 5km의 거리 중 가장 먼 거리는 방에서 현관까지 거리였다고...


뭐든 절실하고 필요하고 심각해지면 늦은 감이 있으니, 괜찮을 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을 때 움직이는 것이 건강도 지키고 실력도 올릴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마치 예방의학처럼.. 증상이 나타나면 증상만 치료하지 말고 원인을 찾아야 하고, 가장 좋은 것은 발생 원인 자체를 차단하는 거라고...


메타인지 대가인 리사 손 교수님의 강의도 언급했다. 메타인지 관점에서 그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MBTI라고. 그걸로 자기규정을 하는 순간 그 유형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자신이 T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에게 공감 따위는 기대하지 말라고 선언하고 있는 거라고.


자신이 게으르다고 규정하지 말라고. 실제 게으름을 묘사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 게으름이라는 자기규정 뒤에 숨어서 게으르고 싶은 마음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라고...


루틴의 강점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러기까지 마치 롤러코스터가 신나게 내려가기 전, 조금씩 빌드업하듯 올라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사전 단계가 필요할 것이지만...


그렇다면 정말 해야 하는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게 해줄 거라고.


난 학생들의 습관형성을 위해 절대 완제품 같은 완성을 조급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일단 준비 안되어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시작하기까지, 그렇게 시동이 걸리기까지 상상 이상의 에너지와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시동이 걸리면 그 보상은 확실할 거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단번에 잘 할 수 없음을, 수도 없이 넘어지고 자빠져야 겨우 일어설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고.



특히 수학과학을 잘하는 학생일수록 국어, 영어 공부는 미뤄두는 습성이 있다. 명확한 정답과 이해를 이끌어 내는 수학과학 공부에 비해 국어, 영어 등의 언어는 당장의 성과를 확인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루틴이 필요하다. 루틴은 하지 않아도 하게 되는 일, 마침내는 애쓰지 않고도 힘든 일을 다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큰딸을 모델로 만들어 낸 문구로 딸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과정은 "행복할 만큼만", 그러니 조급하거나 서두르거나 너무 애쓰거나 성취를 강조할 필요 없고, 결과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소소하게 행복을 누리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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