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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교사의 방임과 간섭 사이

by 청블리쌤

동생들과 대화 중에 육아 방식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엄마는 느긋해서 때로는 아이가 기저귀를 들고나와서 갈아달라고 하고, 다른 엄마는 아이가 불편해하기도 전에 너무 자주 기저귀를 확인하여 한두 방울만 보여도 기저귀를 바로 갈아주는 사례를 들었다.


후자는 부지런한 엄마 그 이상의 모형이고, 전자는 무심한 방임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의도나 노력으로 따지면 후자 엄마가 더 큰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전자가 의도적인 방임이나 무심함이 아니라면, 부모의 느긋함과 여유는 아이의 자기주도성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아이가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고 실패하는 과정을 최소화하는 유형이므로,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양육방식을 지속한다면 아이의 자기주도성과 메타인지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고3 담임을 할 때 난 후자에 가까운 유형이었다. 특히 도움이 절실한 학생들의 경우는 나의 간섭 같은 관심까지도 좋아했고, 특히 방임에 가까운 담임선생님을 둔 옆 반 학생들이 많이 부러워했다. 그러나 방임하는 반에서 오히려 학생들이 자기주도성이 더 발휘되었다. 물론 많은 옆 반 학생들이 내게 기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살길을 찾아야 했을 것이니, 장기적 관점에서는 의도와 상관없이 학생들이 더 성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관심을 갖지 말고 개입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부모로서 아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방임과 간섭 사이에서 늘 고민하며 각기 다른 균형의 기준을 가진다.


그런데 아이들은 부모의 양육방식이 어떻든 대부분은 다 적응을 하게 되어 있다.


어떤 유형이 정답이라기보다, 오히려 일관되지 않은 기준 없는 양육방식을 더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의 나이에 따라서 그 기준이 유연하게 바뀌어야 할 수도 있다. 그 결정적인 시기가 사춘기다. 사춘기는 아이들의 자의식과 자기주도성이 커져서 부모의 양육방식의 근본까지도 고민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일수록 부모의 간섭이나 개입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아닌 아주 어린 나이라도 자의식이 발달을 하면서 주도성을 가지려고 한다. "내가, 내가"라는 말을 남발하는 시기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해보겠다고 하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간에 어설프고 형편없게 마련이다. 답답한 마음에 부모님이 바로 개입해서 대신해주게 되면 아이의 주도성은 타격을 입는다.



유아기가 아니라도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난 늘 그 점을 늘 의식하면서 교육한다.


이제까지 능숙하게 해 오던 학생들은 상관없지만, 한 번도 제대로 학습을 해본 적이 없는 학생들은 각기 필요한 영역에서 초라한 출발점과 끝없어 보이는 시행착오가 필연이니, 기다리고 참아줘야 한다.



메타인지 자기 전략은 스스로 상황을 모니터링해서 영점 조정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런데 실패를 어른들이 일일이 다 막아주려 하면,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아이들 스스로 전략적 사고를 개발할 기회도 박탈될 수 있다.



어른의 개입은 어른의 불안함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자기만족일 때가 많다. 자전거 넘어지는 꼴을 볼 수 없다고 뒤에서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면 아이는 영영 혼자 자전거를 탈 수 없다. 물론 시작 지점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대개는 필요하지만, 넘어질 각오로 손을 놓아주어야 아이는 자립할 수 있다.



양육방식, 교육방식도 부모와 교사의 고유의 기질이 반영된다. 정답이 없으니 자신의 기질과 다른 모형을 애써 취할 이유와 필요는 없다. 그러나 늘 균형점을 의식해야 한다.


정치도 견제세력이 있어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한 방향만 고집하는 것으로부터 약간은 마음을 열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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