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난 이에게 조언보다 공감을
오늘은 수능일이다.
온 국민이 숨죽여 지켜보게 되는 수험생과 학부모의 그 무게와 부담은 겪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험생들의 모습은 부모의 입장이 아니라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간절함을 느끼게 한다.
모두가 수능장을 나선 아이의 뿌듯함으로 기뻐하고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기를 기대하며 마음으로 응원한다.
문득 수능일이 다가오니 내년에 수능을 보게 될 작은 딸의 부담감에 더하여 2년 전 큰 딸의 수능 후 상황이 떠올랐다. 모두가 수능을 후회 없이 아픔 없이 끝내고 다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러면 좋겠지만 큰 딸처럼 아픔을 안고 나올 수 있으니.. 수능이 끝나기 전에 학부모는 어떤 상상도 금물이긴 하지만... (난 혹시 아이가 수능을 포기하고 집에 올까 봐 외출하고 돌아오는 아내의 문 열리는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었다.)
수능응시하는 아이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그 부담이 전달되지 않게 수능일에도 학부모들은 그저 죄책감 없이 자신의 생활을 즐겁게 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기도하는 마음이면 부모의 마음은 더 편해지기는 하겠지만...
부모와 아이의 기대가 어디까지였는지와 상관없이 수능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 자체가 뜨거운 박수와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다. 아쉬움도 있고, 생각지도 않았던 인생의 경로가 펼쳐질 수도 있지만, 어떤 상황을 통해서도 아이와 학부모도 성장할 것이며, 완벽한 시나리오로 진행되지 않아도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여전히 희망은 있는 것이니.
2년 전 큰 딸이 수능을 망치고 시험장을 나오는 걸 온 가족이 아픈 가슴으로 바라봐야 했다. 여간해서는 울지 않던 딸이어서 그 아픔의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아내는 딸에게 괜찮다고 위로했다.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전달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괜찮지 않았다.
중3이었던 둘째 딸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며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재수해야 돼?” 현실적인 조언이었지만 큰 딸 귀에 들어 올리는 없었다.
난 딸 옆에 붙어서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보통은 눈물이 말라야 입이 열리기 마련이다. 답답함으로 재촉해서는 안 되는 거다. 그래서 그냥 기다렸다. 언제든 마음이 내키는 순간에 옆에서 귀 기울이겠다는 안정감만 느끼게 해주었다.
드디어 딸의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2교시 공들여 풀었던 수학문제 답을 친구가 자신과는 다른 답을 외치는 바람에 멘붕이 온 거였다(알고 보니 자신의 답이 맞았다). 점심도 안 먹고 괴로워하다가, 수능을 포기하려는 갈등을 하다가 배고픈 상태로 계속 시험을 응시했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야! 아빠가 중간에 답 맞혀보는 거 하지 말랬잖아! 그리고 누군가 억지로 자신의 답을 알려도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는 거고, 어차피 다음 시험이 더 중요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 마음 편하라고 하는 얘기일 뿐 당사자의 마음의 문만 더 닫게 만드는 책망일 뿐이다.
난 그냥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감하면서 들어주었다. 딸이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나서야 나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입시를 많이 지도하고 겪어 본 아빠의 의견을 듣고 싶은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
수능 폭망이 확정되기까지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 가채점을 해보고 자신의 점수가 정말 평소보다 많이 낮은지 객관적으로 확인이 된 후에야
둘째 등급컷을 확인해 보고 컷은 올랐는데 자신만 성적이 떨어졌다면, 그렇게 두 가지가 다 확인이 되면 망한 것 맞으니 그때 가서 폭망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책을 세우면 된다.
그렇게 겨우 진정된 딸과 함께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어떨 때는 힘들어하는 상대에게 조언을 해줄 수 없어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데 오히려 조언해 줄 게 없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에게는 더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대개 그저 들어만 주기 때문이다.
첫 여고에서, 첫 고3 담임을 할 때 입시에 대해서도, 여학생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잘 몰라서 상담을 요청하는 아이들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아픔을 함께 느끼며 그저 진심으로 들었다. 그러니까 말하던 학생들이 막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수습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서 해결되었다고 감사하면서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현실적인 대책이 있고 해줄 말이 있어도, 자신이 가진 생각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있어도, 그래서 입이 근질거려도 상대방이 조언을 필요로 할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시행착오를 겪게 되더라도 우리가 정답을 스포하지 않고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상대를 향한 최고의 배려다.
조언은 그저 말하는 사람 입장이다. 조언은 상대방이 먼저 마음을 열 때에만 유용하다.
그래서 제일 최악의 경우는 상대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조언만 남발하는 경우다. 충고하고 조언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오늘은 수능일이다. 교직에 들어서서 고3 담임을 할 때와 큰 애가 수능칠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수능감독을 안 한다는 게 너무 몸과 마음이 편하지만 참 어색한 느낌이다.
수험생도 수능감독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험생 부모님들이 어떤 마음인지 아니까 그저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다. 그 힘겨운 과정을 넉넉히 잘 감당하기를... 혹 아쉬움으로 눈물짓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그 상황조차도 잘 이겨내기를... 그리고 그 상황을 아픈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부모님들도 그저 아이가 드디어 이제까지 인생에서 가장 큰 삶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서 마주하게 되었다는 대견함과 자랑스러움으로 뿌듯해하기를... 가까이 있는 누구에게라도 입보다는 귀를 열어 마음을 열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를...
<완벽주의자를 위한 행복 수업>이라는 책의 한 대목에서 조언에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우리는 종종 고민을 이야기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조언을 한다. 그러나 정작 친구는 우리 생각과 정반대로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입장이고 또 한 사람은 모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다. 본의 아니게 우쭐거리면서 온정을 베푸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반면 귀를 기울이면서 공감을 표시할 때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첫째,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너를 걱정하고 있다. 너는 나를 믿어도 된다.” 둘째,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똑똑하고 유능하니까 이 일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언을 듣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느낄 때 용기를 얻는다. 사실 특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조언을 삼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조언을 하는 것이 항상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대개는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조언을 해주는 것이 적절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미루는 습관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에게 내가 가진 유용한 지식을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먼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다음에 해야 한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해결책을 제안해야 한다. 상대방이 언제 조언을 듣고 싶은지 알 수 있는 간단한 법칙은 없다. 그래서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치료사나 친구는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여야 할 때와 조언을 해야 할 때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