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멘토링 신청서를 개별접수를 받는 바람에 나를 찾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내가 부재중에는 다른 담임쌤들이 일일이 내 자리를 안내해 주어야 했으므로...
내 자리 뒤에 이런 안내문이 붙었다.
담임쌤들의 평소 모습으로 추론컨대 짜증의 표현이 아닌 친절한 배려의 마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들이 수시로 날 찾는다. 영어멘토링 점검, 코칭, 상담 등의 이유로...
멘토링 아니라도 사소한 것도 내게 물으려 다가온다.
젊은 시절...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에...
수업 중 단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은 다음 영어시간 전까지 내게 직접 찾아와서 단어 재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그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을 누군가 참지 못하셨는지 "교무실 내 정숙"이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나를 향한 경고문이었던 셈이다.
학년부장쌤은 내게 와서 편하게 얘기하는 학생을 예의 없다고 몰아붙이시기도 했는데, 그때 대놓고 대들면서 학생을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이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니 지금 상황이 더 감사하고 감격스럽게 느껴졌다ㅠㅠ
나의 교육은 협력과 배려의 연료로만 유지된다.
담임쌤들은 나의 교육활동을 유별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학생상담하시면서 적극적으로 프로그램 참여를 권하시기도 하셨다.
물론 학생들에게 비용 부담 없이 진행하는 과정이라서 부담 없이 홍보하고 권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마음을 함께해 주신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응원 같은 격려였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멈출 수 없었고다, 특히 영어멘토링학습코칭은 19년째 그냥 교사로서의 삶과 일상이 되었다. 멘토링 확장판인 방학 온라인 자기주도학습코칭반이나, 2학기 청블리간섭반도 일상이 되어가는 중이다.
일상은 그렇게 힘들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큰딸은 미리 계획하고, 일어나지 않을 변수까지도 준비하며 일을 추진하는 나의 습관을 물리학도의 관점에서 관성이라고 표현했다. 관성은 시작만 힘들 뿐 이후에는 오히려 멈추기가 더 힘든 법이니까. 코로나 시국에는 멘토링을 멈출 수가 없어서 온라인도구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게 학생들의 절실함을 마주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뿌듯한 마음과 교사로서의 절실함도 행복하게 키워가는 중이다.
얼마 전 존경하는 선배님이 미국의 멘탈코칭시스템에 대해 얘기해 주셨다. 힘겨워하는 대학생들 대상으로 마음이 힘들 때 상담 등을 통해 심리치료처럼 진행한다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SAT 고액과외는 족집게 과외가 아니라 멘탈코칭이라는 걸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미국은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 오픈되어 있고 회복에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학교에 상담센터와 상담교사가 배치되어 있지만,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낙인과 편견이 심해 문턱이 높고, 대부분은 개인적인 영역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시스템을 갖춰도 본인이 내켜 하지 않으면 학교든, 병원이든 찾지 않을 것이니, 정신적인 어려움을 개인 의지와 노력의 영역으로 선을 그으면 안 될 것 같다.
모두가 느끼는 대로 우리나라는 학생과 학부모의 마음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학부모는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던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은 사교육에서 실질적인 학습효과보다 다른 애들 하는 만큼은 하고 있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당장의 진통제일 뿐 치료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오히려 아픔에 직면해야 이후에는 안 아플 수 있는 길이 열릴 텐데, 아예 아픔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공부할 때 실수하고 좌절하며 문제가 안 풀리는 답답한 고민을 겪어야 혼자서 문제를 풀게 되고, 성취감에 의한 자기 효능감, 주도성을 회복할 수 있는데, 다른 이들과 진도와 속도를 비교하면서, 그런 배움의 즐거움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면서 학교수업, 학부모, 학생, 교사 대상 강의에 담는 내용 자체가 멘탈코칭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블로그 글이나 블로그 컨설팅, 친구나 지인 학부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그렇게 해결책을 꼭 제시하지 않더라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실제로 그동안 교사인 동료나 친구, 선후배들이 답을 몰라서 내게 상담을 청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딸들도 아빠에게서 영어교사 컨셉보다 멘탈코치 역할을 더 원했다. 때로는 본인들이 알고 있고 확신하는 것이 흔들릴 때, 나와의 대화를 통해 확신을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해주는 잔소리들도 그런 맥락이다. 특히 절실함만큼 마음이 많이 아팠던 교육특구의 학생들이 나의 잔소리에 격한 반응을 보였었다.
멘탈코칭이 중요한 것은, 뻔한 이야기나 고민으로 치부하지 않고, 성급하게 다그치듯 결론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진심이 전해지면, 어차피 결국 힘을 내는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이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역할에 한계를 느낀 적도 종종 있었다. 아이들이 마음을 열지 않을 때는 아픔의 경중에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전문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마음이 너무 아픈 경우에도 내가 함께 있어 준다는 것 외의 현실적인 역할을 해줄 수 없어 무력함을 느끼기도 했다.
적어도 나의 이야기로 위로가 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전문적인 치료까지는 필요 없는 단계일 것인데, 그래서 멘탈코치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선배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교육활동에서 멘탈코칭의 영역과 가능성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이상의 역할을 해왔지만 수석교사라는 타이틀이 그 기회를 더 보장해 줄 거라는 격려도 해주셨다. 그 타이틀이 마음이 힘든 동료교사가 다가오도록 끄는 힘도 있을 거라고.
일일이 납득시키려 하지 않아도 직책이 주는 자격 같은 힘이 있을 거라고.
이름이 주는 힘은 개념화되어 추가 설명이 필요 없는 자격을 의미할 것이니까.
자격이 있든, 없든 난 초대 받은 자리에 나아간다. 내가 먼저 하는 초대만으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할 때 그 큰 한 걸음의 동력에 의지하여 마음의 회복과 의지의 발현 등을 이뤄가는 것을 응원하며 공감하며 함께 바라보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