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미스터리 전략 3 – 규칙 깨부수기>
1917년,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스클로브스키는 매끄럽지 않음이 선사하는 미학적 이점을 주제로 영향력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게을러 뭔가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의 뇌를 언급하며, 현실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이런 성향을 뛰어넘게 하고, 주의력을 되찾게 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썼다. 스클로브스키의 주장을 들어보자. “예술은 삶의 감각이 회복될 때 존재한다. 예술은 인간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하기 위해, 돌을 돌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대상을 ‘낯설게’ 하는 것, 형태를 어렵게 만들어 인식의 난도와 길이를 높이는 것이 예술의 기술이다.”
매끄럽지 않음과 낯설게 하기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 시를 예로 들어보자. 시는 종종 글쓰기의 일반적인 법칙에서 자유롭다. 시가 지켜야 할 요건이 있다면 언어가 다르게 느껴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시인 겸 평론가인 허쉬필드의 말처럼 시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되새기게 한다. 시는 언제나 그랬다.
... 낯섦은 시를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끼도록 만든다. 이렇게 매끄럽지 않은 예술에 누가 시간을 할애하려 할까? 하지만 잘 쓰인 시는 묵은 단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로써 우리의 무관심으로부터 언어를 구원한다.
의도적 낯설게 하기가 주는 긴장. 거기서 멈춤이 생기고 갭을 메우려는 인지적 활동이 활발해진다. 일정하고 예측가능한 자극에 익숙해진 뇌를 깨우는 지점인 것이다. 예술작품 같은 수업의 시작점이다.
“메시지의 개연성이 높을수록 정보 전달력은 떨어진다. 진부한 클리셰는 위대한 시만큼 빛나는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 노버트 위너
이것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의 역설이다. 그들은 이해하기 쉽거나 매끄럽지 않다. 우리를 깊이 건드리는 것은 쉬운 콘텐츠가 아니다. 구두점이 없는 시, 전례가 없는 음악, 원칙을 깨는 동화, 기존의 장르적 클리셰를 거부하거나, 영리하게 비꼬아 활용하는 영화에 주목한다.
아름답다는 느낌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카니예는 자기가 만든 부조화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음처럼 들릴 수도 있다. 바흐의 장엄한 음악을 누군가는 그저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형태의 매끄럽지 않음과 부조화에 반응한다. 하지만 취향은 수없이 다양할 수 있어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아름다움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몰입해야 하고,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 대상과 씨름해야 한다. 존 키츠는 말했다. 아름다움이 진실이며, 진실이 아름다움이라고. 그러나 키츠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진실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모호한 진실로 잊을 수 없는 질문을 남기는 대상과 마주할 때 얻을 수 있는 위로다.
친숙함에 안주하면 편하다. 인간의 뇌는 태생적으로 게으르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예술은 묘하고 불안한 느낌을 전달하며 좀 더 수수께끼 같은 길을 선택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몸부림이다. 향유하려는 몸부림, 설명하려는 몸부림이다. 덕분에 예술은 계속된다.
예술에 수업과 학습을 치환해서 읽었다. 친숙함에 안주하거나, 몸부림이 없다면 제대로된 수업이 아닐 것이다.
<4장 미스터리 전략 4 - 마성의 캐릭터>
등장인물을 만들 때 셰익스피어가 감행한 가장 위대한 혁신은 생략이었다. 이 위대한 극작가는 미스터리만 남을 때까지 정보를 제거했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런 방식을 ‘전략적 불투명성’이라고 소개하며,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요소를 삭제하여 향후 펼쳐질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는 논리적 근거, 동기, 도덕적인 원칙을 차단했다.“고 설명했다.
때로는 의도된 불친절함과 생략이 학생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갭을 메우려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교사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장황하고 말이 많으며 모든 걸 다 알려주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부모 입장이 되면 객관화를 상실한 채 아이들에게 늘 스포일러를 투척하여 의도하지 않게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