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베르테르 효과'...
독일 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롯데 그룹의 이름은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로테에서 비롯되었다)
딸 덕분에 어린 시절 의미도 모르고 읽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참고로 베르테르는 일본식 발음이며 독일식 발음은 '베르터'라고 하지만, 어색하다...
관습의 관성은 이렇게 무섭다. 편향은 옳은 것도 불편하게 하는 습성이 있다.
둘째 딸 독일문학 교양수업에서 베르테르를 꾸짖어야 할지 위로할지 선택하여 편지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전자의 입장이 되기 쉽다. 올바른 가치와 규범은 우리가 바르게 사는 지침이 되기도 하지만 공감과 배려가 아닌 비난과 정죄의 명분이 된다. 특히 기득권 계층처럼 규범 안에 들어와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특히 더 그런 성향을 보인다.
가치관을 형성해가는 젊은이들을 향한 기성세대의 시각도 그와 닮아 있다.
실패와 좌절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배움과 성장은 어떻게 일어난다는 말인가?
이 소설은 계몽주의처럼 이성이 지배하고 규율이 엄격했던 시대상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자살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니... 그 당시 각국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그래서 억압을 느꼈던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지지와 공감을 얻어냈다. 그게 저자인 괴테의 의도였다면 대성공이었다.
자칫 소설 내용에 자살을 옹호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극중에서 베르테르가 한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가 있네. 인간은 원래 기쁨이나 슬픔이나 아픔을 어느 정도까지는 참아 낼 수 있지만, 도에 넘치는 경우에는 즉시 파멸에 이른다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는 누군가가 강인하느냐 나약하느냐가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정도를 과연 참아 낼 수 있느냐는 것일세. 악성 열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을 겁쟁이라 부르는 것이 무례한 일이듯,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비겁하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어쩌다 몸이 심한 공격을 받아서, 기운도 소진하고 기능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네. 요행히 병을 잘 이겨 내어서 상태가 급변하고 정상적인 생활 궤도를 되찾을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죽을병이라 부른다는 것을 아마 자네도 인정할 걸세. 그렇다면 이보게, 이것을 우리의 정신에 한번 적용해 보세. 주변의 영향에 크게 좌우되고 무슨 생각이든 쉽게 떨쳐 내지 못하면서 편협한 삶을 영위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마음의 평정을 상실하여 파멸에 이른 사람이 있네. 그런 경우엔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그 불행한 사람의 상태를 아무리 정확하게 파악하고, 아무리 간곡하게 설득해도 소용이 없네! 건강한 사람이 환자의 침대 옆에 서서 환자에게 자신의 힘을 조금도 불어넣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질세.
그렇다고 이 글이 자살 예찬은 아닐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나눌 수 있는 공감의 모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어떤 행동이나 모습이든 우리의 시각과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판할 일은 아닌 것이다.
성경의 욥기가 생각났다. 욥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친구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럴듯했지만, 욥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런 말이라면 침묵이 훨씬 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아니 침묵이 오히려 강력한 위로가 된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조건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침묵이라면, 오히려 더 많은 생각과 진심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니까.
괴테는 자살을 부추기려 한 것이 아니라 비난하지 않고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 끝을 보여주고 그 삶을 대하는 다른 이들은 오히려 살아야 한다는 외침을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에서 상상 이상의 복수를 하고 나서 통쾌한 마음보다는 그 끝을 보고 나서는 복수를 마냥 원하게 되지 않는 씁쓸함을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베르테르가 말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이미 주변 사람들의 위로의 말이 가닿지 않을 것이며, 의지로 이겨내라는 응원의 말조차 부담이 될 것이다. 죽을 만큼 힘들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적 묘사일 수도 있다.
소설과 문학을 논하는 이 시점에서 이런 말은 MBTI의 "T"에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지금 이 시대의 관점에서는 이럴 경우 정신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물, 상담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가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베르테르가 말하는 힘겨움의 유형은 흡사 우울증 증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교에서 나의 따뜻한 위로와 응원의 진심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과정의 우여곡절 끝에 나의 상담이 아닌 약물치료로 오랜 시간을 거쳐 점점 호전되어 결국 정상생활을 하게 되었다. 교사로서의 무력감을 느꼈지만, 오히려 그렇게 한계를 인정해야 치료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겸허하게 깨달았다. 약물치료보다 더 어려운 문턱은 본인과 보호자가 치료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혼자서 외롭게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긴터널에 고립되어 있어선 안 된다. 자신은 괜찮다는 자기 위로도, 남들의 응원도 통하지 않는 그 순간에는 약물치료만으로도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물론 나의 어설픈 조언보다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담긴 소설의 서두, 엮은이의 말...
가엾은 베르테르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들을 정성껏 한데 묶어 여기 여러분 앞에 내어 놓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나에게 고마워하리라는 것을 믿어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은 베르테르의 정신과 성품에는 감탄과 사랑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그의 운명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베르테르와 같은 충동을 느끼는 착한 영혼이여, 부디 그의 슬픔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으십시오. 그리고 스스로의 잘못이나 운명 탓에 절친한 친우를 사귀지 못하였다면, 이 자그마한 책을 그대의 벗으로 삼도록 하십시오.
아래는 이 소설(열린책들 버전)을 번역한 김인순번역가는 역자해설 일부
괴테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것은 정열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정열을 자제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날 불행을 경고하는 데 있었다. 이런 사실은 소설 서두의 엮은이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질풍노도 시대의 시인 야코프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의 말에서도 괴테의 이런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베르테르의 공적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렴풋이 예감하지만 분명하게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정열과 감각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데 있다.〉
괴테는 스스로 글을 통해 슬픔과 위기에서 벗어남으로써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으며, 괴테를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베르테르의 고통과 슬픔을 빌려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고 위로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딸 수업에서 교수님은 34개의 답변들 중 딸의 답변과 베르터를 꾸짖는 답변 두 개만 보여주셨다고 했다.
베르테르는 충분히 주변에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고, 자선을 베풀며, 인간적이면서 인격적으로 모든 이를 대하는 등의 훌륭한 모습이 그려져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그 증인이었다.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부정적인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게 비판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흠을 잡듯이 마치 이렇게 비판을 이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베르테르는 감성이 깊고 열정이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결혼을 생각하면 매력적인 남성은 아닐 수도 있었다고. 안정된 직장을 갖지도 못했고, 그조차 뛰쳐나왔으니까.
사회 시스템에서 인정받거나 존중받는 자리에 있지 않았던 것이 그를 더 힘들게 했을 것이라고.
그의 외적인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예민, 다혈질, 자신에게 과몰입, 우울, 충동, 무절제, 강박적 집착, 피해의식, 고집, 질풍노도 등으로 묘사할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로테의 애매한 태도를 비난할 수도 있다.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로테 입장에서 혹 베르테르에 대한 연모의 마음이 있었더라도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결혼 대상으로는 생각지 않았던 거 아니냐고, 혹시 모르는 불안감이 있었으면서도 베르테르에게 권총을 빌려주어 자살을 방조한 거 아니냐고...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부족함과 약점을 안 좋은 결과의 원인을 찾아내는 정당한 과정인 것처럼 판단하며 단죄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회생의 의지조차 꺾어버리는 말일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곳이 성장의 출발 지점이다.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은 모두 이런 전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딸은 베르터에게 진심을 전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쪽을 선택했고 이렇게 글을 썼다.
제가 '베르터'였어도 같은 결정을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어떤 한 부분이 좌절되면 또 다른 부분에서 희망을 찾아서 찬찬히 다시 회복해 나가곤 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동아줄을 붙잡고 그게 썩은 동아줄이었다면 또 다른 동아줄을 붙잡고 그렇게 필사적이면서도 느린 속도로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나갑니다. 그러나 붙잡을 구석이 단 하나도 없어진다면, 희망을 볼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땐 인생을 살아나가는 게 너무 힘겨울 것 같습니다.
'베르터'의 경우 경직된 사회로 인한 꿈의 좌절,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하는 위로가 되지 않는 친구들, 유일한 행복인 듯했던 '로테'를 향한 사랑의 좌절 등으로 붙잡을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붙잡을 구석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좌절의 순간에 무척이나 괴로웠는데 모든 상황이 하나하나 썩은 동아줄이 되어 붙잡을 곳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된 '베르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베르터'는 세심하고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로 끝없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되뇌며 더욱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베르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너를 이해해.' 입니다.
'베르터'는 '알베르트'에게 자살하는 이들의 상황, 감정을 알지 못하면서 성급하게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단죄해선 안된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이 되기까지의 '원인'을 알아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과인 행동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공감'을 요구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하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베르터'는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합니다. 자신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어 그랬을지라도 '베르터'는 결과보다는 원인을, 행동보다는 그것을 유발한 감정을 중시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를, 자살을 하기로 점점 마음을 굳히고 있는 그의 마음을 어리석다고 꾸짖거나 그 선택이 틀리니 마음을 돌리라고 설득하기보다는,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그의 마음을 들여다봐주며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준다면 그의 마음이 크게 위로를 받을 것이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온전히 그의 편에 서서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절망적인 상황, 감정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음에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설득, 조언한 점이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위에서 말했 듯 그의 결정에 공감합니다. 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됐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이것을 '베르터'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너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봐서라도, 그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라도 살아달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봄은 반드시 다시 온다고 말입니다.
글을 공유하며 딸은 이렇게 전했다.
교수님은 마지막 부분을 아주 좋다고 하셨답니다. 이 부분을 쭉 읽으셨어요
"저는 위에서 말했 듯 그의 결정에 공감합니다. 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됐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이것을 '베르터'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너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봐서라도, 그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라도 살아달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봄은 반드시 다시 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딸에게 답변해 주었다.
아빠보다 잘 쓴다는 엄마의 성급한 칭찬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다. 베르터가 결정 전에 너를 만났으면 소설로 완성되지 않았을 거다.
너는 축복의 통로로 수많은 영혼을 살리고, 아픔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는 은혜로운 세심한 공감의 마음과 글솜씨를 가졌구나. 글이 완전 감동이다. 교수님도 보는 눈이 있어 완전 신뢰다
다시 읽으니 눈물도 난다ㅠㅠ
동생이 쓴 글을 읽은 언니는 힘들 때 읽어야겠다고 답변을 남겼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톡을 남겼다.
너희들에겐 늘 붙잡을 구석이 있는 거 알지?
물론 부모를 의지해도 된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지만...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소망의 의미를 담았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엄마 아빠가 먼저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니까, 그때가 아니라도 늘 변함없이 붙잡을 구석일 것이니까.
삶에서의 고난과 아픔은 인정하며 공감으로 함께해 줄 수 있지만, 베르테르와 같은 결정에 공감할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의 의도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힘들 때는, 오히려 세상의 모든 힘든 사람을 대표해서 세상을 떠난 베르테르를 보고 위로를 얻고 삶의 의지를 회복하라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치료의 필요성도 함께 고민해 보라고... 그건 나약함을 영영 인정하여 낙인찍는 게 아니라 더 큰 용기이며, 삶의 강한 의지의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