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중학교 1학년 교실에 중간고사 시험감독을 들어갔다.
중1 여학생 한 명이 시험에 몰두하다가 연필을 떨어뜨렸다. 자리 이탈은 부정행위 오해 소지가 있어서 학생들은 눈앞에 두고도 함부로 주워들 수가 없다.
바로 학생에게 다가가서 연필을 주워주었다.
학생은 내가 다가가는 순간부터 민망함에 소리 없이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난 학생에게 미소 지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데 또 펜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싸인펜을 떨어뜨렸는데, 아까 그 학생이었다. 떨어지는 순간부터 당황함을 쑥스러운 웃음으로 숨기고 있었다.
바로 다가가서...
"왜 자꾸 떨어뜨리고 그러니?
조심하지 않고, 자꾸 이럴래?"
라고 하지 않고...
나도 웃으며 괜찮다는 아까의 표정과 말을 한 번 더 반복해 주었다.
시험이 종료되고 답지를 걷고 나니 이 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무슨 과목 선생님이냐고 내게 물었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면서 맞춰보라고 했다. 한두 번 기회만 주려고 했는데 영어쌤이라고 한 번에 정답을 얘기해서 엄지척해주었다.
(내신시험 시 각 반의 절반 정도 학생들이 학년을 교차해서 이동한다. 양옆 줄에 다른 학년 학생들이 자리하게 되므로 부정행위 확률을 줄일 수 있기 때문)
시험 시작 전, 1학년 교실로 이동해 있던 3학년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전날 영어시험만큼 수학시험도 잘 치라고 응원을 했다. 영어시험 망쳤는데 그게 응원이 맞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걸 기억하고 맞혔다면 주의력이 깊은 학생일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학생은 수학문제를 몰입해서 풀고 있었다.
3학년 영어쌤이라고 좀 더 자세히 얘기하니까, "3학년이 되어 뵐게요"라고 얘기해서 놀랐다.
적어도 내게는 중3이 되어 선생님으로 만나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아직 초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하는 중학교 1학년 5월 초에 내 비주얼을 제대로 알아봤을 리는 없고ㅋㅋ
아마도 진짜 실수해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말과 표정으로 전달되는 친절함에 반응했을 것이다.
학생은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대답 같은 반응을 기대하는 듯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이 학생은 반드시 중3이 되겠지만, 나는 올해 이 학교 만기라서, 내년에 학교를 옮겨야 하니 약속을 지키려면 2년을 내리 유예해야 하니까.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부디 이 학생이 이 일을 까맣게 잊기를 기도하고 싶었다.
해맑은 표정의 아이에게 쌤이 올해 이 학교 마지막이라서 너 중3 때는 학교에 없을 거라는 말을 구구절절이 할 이유는 없었다.
오늘만 기분 좋고 자연스럽게 잊히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혼자서 과몰입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의 실수에 더 관대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소한 실수에도 아버지의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던 나는, 완벽할 수 없다는 현실을 완벽한 척하는 위선으로 포장하며 늘 지치고 힘들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때에도 올백 맞았을 때에만 나를 업어주셨다.
중간고사 아침 등굣길에 중학생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최대 87점까지 맞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87점을 맞으면 부모님이 만족하시지 않을 거야."
슬펐다.
시험성적으로 부모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물론 불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효도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성적 안 나와도 가슴 아픈데 불효자까지 되는 건 너무 가혹하다. 게다가 그건 공부의 본질적인 이유도 되지 못한다.
부모님의 압박이 없어도 부모의 만족과 안타까운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달되면 아이들은 과정보다 결과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 즐거운 배움의 성장은 그들에게 사치가 된다. 시간을 단축하는 편법과 뿌리보다 꽃꽂이 같은 애씀이 본질적인 즐거움을 희생시킨다.
속상한 것은 아이의 몫이어야 하며, 실패도 오롯이 아이들이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점수와 노력의 과정은 이미 부모의 것은 아닌 것이며, 부모는 그저 아이들의 직접적인 책임과 감정에 대해 간접적으로 공감하며 함께해 주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실수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곳이 너의 끝이 아니며, 굴곡을 통해서도 우상향할 거라는 큰 그림의 확신을 믿음으로 전해주면서도 생각보다 더 오랜 기다림의 각오도 해야 한다.
방임과는 다르지만 아이들이 실수를 통해 배우게 하려면 어느 정도는 방관자가 되어야 한다.
다정한 무관심이 필요하다.
학생과 얼떨결에 해버린 훗날의 약속은 사실 중요한 초점이 아니었다.
민망해하는 아이에게 실수해도 괜찮고, 혹 그 실수를 한 번 더 반복해도 넌 여전히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해준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게 이런 포용과 존중과 인정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심어졌다면, 난 수업 아닌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어른이 해줄 수 있는 교육을 실연했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