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 영어학습법 특강을 신청한 고등학교 1, 2학년 학생들이 순수한 호기심과 간절함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강의 전날 실시된 6월 모의고사 상처를 굳이 헤집었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 아픔의 크기만큼 성장할 거라고.
사실 아픔과 후회가 있는 그 지점이 출발점이 되는 것이니 상처나 후회를 안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 학생들은 자만이든 착각이든 이곳에 있을 이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니 여기 있는 간절함으로 여러분들은 이미 첫 관문은 넘은 거라고. 출발점 인식과 거기 머물지 않으려는 그 간절함만으로도.
그 대신 한 번에 이루고 바로 점수로 확인하려 생각하지 말고, 그저 멈추지만 말라고.
영어는 나도 모르게 해석이 되고 문장이 보이는 게 진짜 성취인데 그 성취의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단 스스로 조금씩만 더 욕심내면 그 기간이 단축되는 건 확실하다고...
내 강의를 듣자마자 다음날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는 말라고. 안 하던 짓을 하면 뇌가 놀라서 요요현상이 오게 되니, 뇌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티 안 나게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열정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별로 하는 것 같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 일상에서 반복되는 습관의 관성을 이용하도록 해보자고...
한 번에 큰일을 이루려 하지 말고... 남들과 비교하지도 말고 오늘 나만의 최선을 다한 후에 한 걸음만 더 내디디라고...
그 일상이 기적의 티저일 거라고.
학생들이 더 몰입하도록 사례를 들어가면서, 아직 늦지 않았음을 설득하며,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용기를 내어 대입에서 끝나지 않을 삶의 위대하지만 행복한 도전을 응원하는 마음을 전달하려 애썼다.
강의 후 개별질문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떤 여학생은 내게서 확신을 얻길 원하며 이렇게 질문했다.
"정말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기준을 어디 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하니까...
남은 3번의 영어내신에서 꼭 1등급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목표를 갖는 건 바람직하지만 목표 성취의 결과만으로 성공 여부를 판단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1등급 결과는 노력한 끝에 어쩌다 보니 주어지는 것이니, 그저 매일 조금씩만 욕심을 더 내면 된다고. 혹 이루지 못했더라도 이전의 노력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니 다음 기회를 또 노려볼 의지와 의욕을 계속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잠을 안 자면서 모든 에너지를 다 끌어모으려 하지는 말라고. 강의에 몰입해서 받아들인 방향대로 자신을 믿으면서 잘 실행해 보라고.
쉬는시간도 없이 90분 강의를 이어갔는데 강사인 나도 학생들도 그 누구 하나 지치지 않는 몰입이 지속되었다.
강의 시작할 때 대뜸 학생들에게 물었다.
나를 아냐고. 도대체 뭘 믿고 온 거냐고.
학교에 대한 신뢰인 것 같았다. 알아서 검증받은 좋은 분 섭외해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강의 시작 전에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오셔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가셨고, 나와는 초면이었던 진로부장 선생님도 시작부터 끝까지 강의실 밖에서 자리를 뜨지 않으시면서 친절하게 아이들을 격려하고 행사 진행을 도우셨다.
공교육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순간이었다.
아이들은 비판적 사고 없이 그냥 내 얘기를 다 흡수하고 있었다. 이런 순수한 신뢰와 몰입은 교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환대다.
내 가슴이 다 뜨거워졌고, 학생들에게 모든 걸 다 나눠주고 싶었다. 이 아이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현실이 갑자기 너무 슬플 정도였다.
이 환대 같은 몰입은, 그들 인생의 획기적인 사건이 되게 하겠다는 나의 비장한 결의와 준비와 강의의 열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절실함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잘했다는 뿌듯함보다 그 순수한 신뢰와 간절함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난 이미 만남 전부터 간절히 기도하면서 응원의 마음이 가닿기를 바랐는데 이후 만남이 기약되지는 않았지만 만남으로 응원은 실체가 되었다.
강의하러 교정에 들어선 순간, 다음날부터의 연휴를 맞이하는 기숙사 앞에 정돈된 학생들의 캐리어를 보고 가슴이 찡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저런 훈련 같은 시간을 버티도록 하는 건지.. 그게 그저 버팀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부디 그 훈련이 친구들과의 우정으로 빚어지는 추억이 되길...
그들의 학업에 대한 애씀도 과정 중에 진정한 배움과 성장의 기쁨으로, 결과를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보상받고, 도달점에서 뛸 듯이 기뻐할 수 있기를...
너무 비장하게, 강요받듯 내몰리지 않게 그 한 걸음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현재 이 순간을 미래에 다 저당잡히지 않으면서 과정 중에 단 한순간의 행복도 놓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지금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멈추지 않으면 그저 출발점일 뿐이니.
자신만의 속도를 누리라고.
나를 만났으니, 적어도 방향을 몰라서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니 그 방향대로 더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걷다 보면 남들에게 뒤처진 느낌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현실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둘째 딸이 모의고사 칠 때마다 낙담하며 울면서 내게 기댈 때마다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그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주고 있었다.
강의하면서 내 영어코스인 청블리코스 패스를 이 자리에 온 모두에게 무료로 선물하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환호했다. 원래 가격은 무료라고 하는 나의 이어지는 말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수강권에 붙은 원래 가격에 상관없이 그 가치를 존중하겠다는 느낌을 받아서 감동이 되었다.
강의 끝날 때쯤 그 자리에 참여하는 그들만을 위해 개설한 내 영어코스를 구글클래스룸을 소개했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학습공간을 선물받은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일단 기말고사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그 직후부터 여름방학을 거치면서 마음껏 활용하기를 권했고, 확신이 흔들릴 때마다 댓글도 남기라고 전했다. 어떻게든 자투리시간을 활용해서 내 단어장을 다운받아 정확한 발음을 강의로 익히면서 반복해서 읽을 것을 권했다. 사실 영어내공의 밑천은 문법보다 단어에서, 그것도 빈도수 높은 단어에서 나오는 것이니... 단어만 채워지면 내 영문법 강의를 단기간에 정주행 가능할 거라고 하면서...
이벤트 같은 만남, 그런데도 이렇게 특별한 교감을 이루었다면, 그 일회성은 그리움으로 기약 없이 마감된다.
그들 인생의 획기적인 사건이 되게 하겠다는 다짐은 이미 단 한 번의 만남밖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한계 의식이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리움도, 애틋함도 없는 무미건조한 사무적인 강연을 바라고 싶지는 않다.
나의 그리움은 모두 응원의 마음이 될 것이니까.
강의 후 이런 소망을 가졌다.
아이들이 작은 성취의 기억을 품고 지내게 되길, 부디 세상이, 당장의 성적이 그들을 그렇게 규정하려 해도 스스로 초라하다 느끼지 않고, 작고 사소한 순간과 그들의 하찮아 보이는 애씀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평생 행복 교육의 내공을 쌓아가기를...
그렇게 진심으로 바라며 그들을 만났고, 정성껏 준비한 내용을 다 풀어 놓았으니 그 만남 자체에는 후회와 아쉬움이 전혀 없다.
후배교사에 대한 무한 신뢰로 학교의 귀한 학생들의 미래를 건 중요한 행사에 날 초대해 주신 교감선생님께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