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삶, 공부(Feat. 교육의 목적과 난점 2)

by 청블리쌤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해답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교육은 아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입니다.


질문만 잘해도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다. 학창 시절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며 지식을 머리에 넣어둘 필요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던 미래사회가 지금 현재 와 있다. 물론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 AI의 거짓말(hallucination)을 분별하고 지식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맥락 파악을 위한 교과의 기본기를 갖추고 문해력과 사고력도 함께 갖춰야 AI 활용이 의미가 있을 것이니 공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공부의 목적이 현상을 보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현상을 보는 눈이 없다면, 그런 수단을 갖추지 못했다면, 당연히 질문을 할 수도 없고, 혹 질문에 대한 답을 이해할 길이 전혀 없을 것이다.

예전처럼 지식의 모든 내용을 이유도 모르고 다 암기하다시피 공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은 오히려 공부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의 질문의 질을 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질문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지식의 부족이나 미천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을 지향하는 앎으로 가는 필수 여정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다른 나라에 유학을 가면 그 분위기에 한동안 적응을 못한다고 한다. 앉아서 수업만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가 보다'하면서 의문이나 문제 제기 없이 순응적으로 지식을 받아들이고, 납득이 안 되면 그냥 암기해버리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잠시 멈춰서라도 왜 그런지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사교육 몰입도 여기에 기여한 바가 큰 것 같다. 문해력을 위한 최소한의 읽기는 사치로 여기면서 학원 숙제만 쳐내기 바쁘다. 그것도 생각의 깊이가 아닌 양적 팽창과 기계적인 반복에 가깝다면 많은 교육 자원과 노력이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걸 인식하면 알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시행착오에 따른 학습주도권을 주지 않으면, 자기주도적 학습이 이뤄지지 않으면 영영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성장이 멈출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학생도 학부모도 영영 착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히려 노력을 많이 했음에도 성취하지 못한 더 큰 좌절감을 본인의 역량 부족의 탓으로 돌리며 더 큰 좌절을 마주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공부는 각각의 관련된 현상을 보는 수단입니다. 이 수단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인간과 자연에 관한 여러 현상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공부가 밥 먹여주는 것도, 교과 지식이 바로 실생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다.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보는 것이 안목이고 교양이다. 배움은 남에 대한 배려로도 이어진다. 배려도 타인을 알지 못하면 베풀 수 없는 것이니까.


현상을 본다는 것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번영을 넘어선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현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현상을 보면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동일한 과정을 거쳐 도달되는 동일한 결과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현상을 볼 수 있게 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현상을 보면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믿음을 가지도록 하는 일이다.

현상을 볼 수 있는 것,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며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 교육이라는 말로 들렸다.

그 삶의 가치를 믿고 실행하는 대표 집단이 교사 집단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플라톤과 주희 철학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진짜다’라는 공통된 주장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종교와도 유사하다고 이야기한다.

믿음의 중요성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시작된다. 열매를 맺는 당장의 성과보다 뿌리내리는 과정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세국어의 유교적 관점과 인식론적 접근에서 앎과 삶은 분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아는 대로 살게 되고 살아가는 대로 앎을 체험한다. 배움이 실용적 필요나 효용성으로만 이어지면 가치 판단이 포함되지 않는다.

배움은 자신의 정체성이 될 수 있으며 성장의 방향이 되며 형성된 인격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모든 삶을 구성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배움과 가르침도 동일한 과정이며 두 가지를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앎과 삶도 분리할 수 없다.


강의를 다닐 때마다 일관되게 주장하는 나의 이야기는... 삶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식으로 전달되는 이야기라면 내가 아닌 전문가의 몫이라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니,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삶의 모습으로 배움과 앎과 삶을 나누고 전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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