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에고라는 단어처럼 혼동스러운 용어도 많지 않습니다. 심리학 분야에서는 프로이드가 에고라는 용어를 그의 성격의 삼원구조에서 사용했습니다. 프로이드는 이드(Id), 에고(Ego), 그리고 수퍼에고(Super Ego)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원초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이드와 숭고한 의미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수퍼에고 사이에서 에고가 균형을 잡는 것이 마음의 구조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에고가 중간에서 중재를 잘 해야만 균형잡힌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에고라는 의미는 현대로 오면서 수많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고를 진짜자아 (True Self)와 거짓자아 (False Self)로 양분화된 자아중에서 거짓자아(False Self) 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철학에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하는 경험(감각, 사고, 행동 등)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경험을 통일하여 모든 경험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당사자라고 생각되는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을 의미합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은 에고보다 더 확장된 원형으로서의 자기 (Self)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쓴 에크라흐트 톨레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불멸하는 영혼에 있다고 설명하고 에고는 우리 자신의 핵심인척 하는 허구적인 이미지를 에고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에고를 위에서 설명한 거짓자아로 설명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철학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윗빠사나 명상에서는 나를 관찰자 시점으로 인식합니다. 나의 몸, 생각, 감정이 내가 아니라, 나를 객관적인 시점에서 관찰하는 또다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다보면 관찰하는 내가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에크라흐트 톨레의 영혼과 에고라는 구분과 많은 기독교 영성작가들의 글에 등장하는 진짜자아와 거짓자아의 구분은 상당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에고 혹은 거짓자아라고 불려지는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이중적 구조로 인해서 인간의 삶은 비극으로 변했기 때문에 어디서 이러한 분리가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데 유익이 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왜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그걸 만들지 않았으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지금도 잘먹고 잘 살았을텐데 왜 그걸 하나님이 애초에 만들어서 문제를 일으켰냐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을 가진측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로보트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고 반론을 합니다. 오늘 저는 이부분에 집중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부분에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선악과는 열매를 먹었을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갖게되는 열매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만의 가치관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자신이 어떠한 문제나 상황에 대해서 선한지 악한지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삶을 살아가게 되는 즉 신과는 분리된 개체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과정을 에고의 탄생으로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는 내면의 하나님의 영(신성)을 따라 사는 삶에서 자신만의 선과 악의 개념을 갖게되는 에고가 출현하면서 내면의 신성과 분리된 에고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상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아서 집을 나온 것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것을 아버지에게 통제받는 삶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옳고 그름을 혼자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삶을 찾아서 유산을 미리 상속받고 집을 떠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에고는 그런 존재인 것이죠. 독자적인 가치체계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에고의 출현이 전혀 의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신성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달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저의 경험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에고는 트라우마와 같은 몸에 남았있는 해결되지 않은 고통에 너무나 취약합니다. 이러한 고통이 남아있는 경우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고 낮은 자존감 등으로 인해서 에고는 거의 기능을 할수도 없습니다. 저와 같은 경우는 그런 의미에서 에고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의 에고에 있어서는 자포자기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에고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러한 에고를 포기한다는 것은 죽음같은 일일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