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통은 때로는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 인생을 인도한다
얼마전에 디바인 매트릭스의 저자 그렉 브레이든의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저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 세상을 시뮬레이션의 세계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많이 회자되고 있던 것입니다. 저도 심한 감정적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제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Perception)이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문제가 저의 삶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이야기가 저의 관심을 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이야기가 더 흥미있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러한 교육은 정해져 있는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고 시뮬레이션이 끝나면 정식으로 어떤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엇인가 진정한 삶 이전에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교육시켜주기 위해서 준비된 것이고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단계라는 것입니다.
지구에서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청지기의 삶이라고 인식하고, 얼마나 청지기의 삶을 잘 수행 하느냐에 따라서 내세에서 어떠한 삶을 살수 있는지를 결정한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훈련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 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성경상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본을 가지고 얼마나 이윤을 남겼는지에 따라서 내세에서 받는 보상이 달라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내세에서는 예수님과 같이 내세에서 다스리는 위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고통은 피할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선행을 통해서 카르마를 해소하고 더이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수 있도록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카르마를 해소하는 장소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무엇인가 본게임으로 가기 위해서 거처가는 장소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윤회에서 벗어나서 해탈하는 것이 달성되면 목표를 달성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는것이 특징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불교는 이세상은 고통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회를 그치고 해탈을 해야 하고 그것만 하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세상에서는 무엇을 하던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은 내세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곳인데, 이세상의 것들은 잠시 있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어떤 눈에 보이는 많은 성취를 이루거나 업적을 쌓는다 해도 그것이 내세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시뮬레이션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서 그부분을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충실하게 살면 내세에서 그러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슬람에서도 내세에서의 보상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9/11테러를 수행하는 것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이러한 윤회나 내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을수 없는 정서적 고통을 당하면서,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지면서 일단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 강했습니다. 그래서 할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측면에서 명상을 시도하게 된것도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호흡과 온몸의 감각을 살피는 윗빠사나 명상을 통해서 감정을 억누르면서 저의 감각을 무시하고 억누르면서 살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나중에 심리학 공부를 하며 게슈탈트기법을 배우면서 더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트라우마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애착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이 감정조절을 할수 없는 것이 특징적인 증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이러한 트라우마가 대물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카르마와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애착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서 다양한 기법들이 나오고 있는데, 객관적으로 효과가 검증된 치료방법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의 해소를 심리치료로 대치할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심리치료가 도움을 줄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부분은 가족세우기 등의 세션들을 통해서 저 개인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트라우마를 신앙안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많은 관심이 있는 부분입니다.
어찌보면 저에게 있어서는 정서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시작된 인생의 방황이 저를 예상하지 못한 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관심도 없었던 명상을 하게 하고, 상담을 받으러 가게 하고, 심리학 공부를 하게 하고, 가족세우기에 참석하고, 최면치료를 받게 하기도 하고, 에너지 치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알게된 것은 저의 고통이 저 혼자만의 고통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결하고 싶었던 인생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세상이 진짜 시뮬레이션이라면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질문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