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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유다의 배신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의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가롯유다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배신의 아이콘인 가롯유다의 심리에 대해서 오늘은 자세히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의 마음을 돌아보는 이유는 우리들도 그와같은 상황에 얼마든치 처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처했던 상황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 (Dark Night of the Soul)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벗어날수 있을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롯유다를 포함해서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내서 독립시키고 나면 한자리씩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봤던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낼수 있는 인물이라는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지혜로 그들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해버리는 언변과 병든자를 치료하고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잠재능력에 기대를 걸었고, 12제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그의 제자가 되었을때 돌아올 반대급부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나중에 이스라엘이 독립했을때 장관자리 정도는 하나 할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12제자중에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가 모아진 돈중에서 일부를 빼돌렸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돈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여인이 비싼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을때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인을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돈이 들어오면 자신이 일부를 빼돌릴수 있었을텐데 라는 마음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자신의 경제적 욕구를 채울수 있는 수단이었고, 잘만되면 나중에 이스라엘 독립정권의 재정부장관 정도는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목표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것이라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가롯유다에게는 날벼락같은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당장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줄이 끊길것이고 이스라엘 독립정부의 재정부장관 자리는 물건너간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장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되는 일을 한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는 이해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지난 3년동안 그렇게 고생하면서 따라다니면서 돈도 관리해주고 일을 해주었는데, 나를 이렇게 배신하다니? 정말 너무한거 아니야? 어쩌면 가롯유다는 큰 배신감과 분노로 잠을 못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한가지 복수의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앞으로 돈을 챙길 기회가 없다면, 나를 배신한 댓가로 예수를 팔아먹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배신했으니 이정도의 복수를 하는 것은 나에게 큰 문제가 없을거야, 그리고 자신이 죽는다고 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팔아먹지 않아도 결국은 죽을거 아닌가, 그러니 내가 잘못하는 것이 뭐가 있겠어. 이러한 생각을 머리속으로 했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에 들자, 그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은 30(노예 하나의 목숨값으로 많은 금액은 아니라고 합니다.)을 받고 예수님께 입맞춤을 함으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유다는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목을 매서 자살을 하게 됩니다. 이부분에서 그의 감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자살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혹은 육체적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서 죽으면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을 끝낼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즉 유다가 목을 매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가 극심한 감정적 고통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예수님이 정죄됨을 보고 뉘우쳤다고 나와 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보면 그가 심정적인 변화를 일으켰음을 보여줍니다. 즉, 순간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돌이킬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극심한 감정적 고통을 경험하다가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또한 해결책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목을 매서 자살을 한 것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영혼의 어두운 밤 (Dark Night of the Soul)을 자신이 삶에서 의미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진것 (A collapse of a perceived meaning in life. )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유다의 상황을 이 정의에 대입해본다면, 그는 돈과 성공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법정에 넘겨지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이 과연 옳은 것들이었나에 대해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들이 아무 죄없는 사람을 법정에 넘기면서가지 추구해야 할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갑자기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고통의 감정이 소용돌이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비되어 있던 그의 양심이 살아나고 그의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추구했던 삶의 의미가 무너져내렸습니다. 더이상 자신의 감정이 부르짓는 소리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수 없을만큼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더이상 그는 삶을 유지할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무너진 자신의 에고와 함께 죽거나, 아니면 무너진 에고가 아닌 자신안에 진정한 자아가 있음을 알아차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무너져내린 에고가 자신이라고 의심의 여지 없이 믿어버린 유다는 무너져내린 에고와 함께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살면서 이러한 상황에 마주하게 됩니다. 때로는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이혼으로, 경제적인 실패로 자신이 그동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인생의 중요한 것으로 여기던 것들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 이때 무너져내린 자신을 지탱하던 것들과 함께 무너질지, 아니면 그 안에서 더 본질적인 자신을 찾아서 일어날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이러한 갈림길에 서 있을때, 에고의 한계에 사로잡혀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안의 새로운 존재를 만나고 소망을 찾아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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