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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사회

어떤 교육이 아이들을 성장하고 자신의 잠재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만드나?

교육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수많은 에너지와 금전적인 투자를 하는 분야입니다.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규모가 크고 각 분야마다 전문가가 넘쳐나고, 일타 강사들은 경제적인 부를 누릴수 있는 사회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이러한 교육에 부모들이 자신들의 노후까지 포기해 가면서 투자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투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도 학부모이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는 결국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부모님들도 계시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들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말입니다. 목적은 비슷하지만, 아이들과 이에 대해서 대화하는 방법이나, 사용할수 있는 자원들, 그리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부모님들의 성향이나 소득 및 교육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이 사용될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닭을 빽빽한 닭장에 넣어서 계속 불을 켜놓고 약을 주면서 키우는 장면을 본적이 있습니다. 얼른 닭을 키워서 시장에 내다 팔려고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한 닭이 건강한 닭이 될수는 없을 것입니다. 잘때 자고, 뛰어놀때 놀고 햇빛을 받으면서 자연의 풀을 먹고 자란 닭들과, 잠도 못자고 좁은 닭장에 갖혀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큰 닭이 같을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수 있습니다. 갖혀지낸 닭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것이 분명합니다. 약도 닭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것입니다. 


왜 갑자기 아이들 교육 이야기를 하다가 닭키우는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운동도 시키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공부만을 시키고, 몇년을 선행학습 시키고,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니게 하는 교육환경이 마치 좁은 닭장에 닭을 가두어놓고 잠도 못자게 하면서 닭을 키우는 환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껏 뛰어놀고 또 공부할때는 하고, 그리고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도 하는 환경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공부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환경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대학만 잘가고 학과만 잘가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살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되면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시키는데 혼자 안시키면 뒤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말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대한민국의 교육이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야기를 하면서 교육을 시키는 이유가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살려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러한 원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두려움과 수치감 때문에 아이들을 몰아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게 될텐데, 그러면 평생 힘든 삶을 살아갈텐데라는 두려움과, 자신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를 하지 못하면 내가 수치스러워 질텐데 아니면 무시당하면서 평생을 살게 될텐데, 그러면 어떡하지와 같은 마음 말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주변의 지인들이 자녀의 교육에 얼마를 썼다더라, 어떤 학원에 다닌다더라, 이런 소리를 듣게 되면 내면의 두려움은 증폭되어서, 자녀들을 더 닥달하거나 없는 살림에 빚을 내서라도 학원에 보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원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두려움과 수치의 감정에 반응하여서 교육을 시키게 되고, 원래의 취지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에게는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거라는 논리를 주장합니다. 이미 그 논리는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 말입니다.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자신의 재능을 펼치면서 살아가는 삶을 바란다면, 부모들의 감정은 이와 짝이되는 사랑, 이해, 격려, 그리고 공감등의 감정반응을 나타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질적인 감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반응으로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는 부모로 변질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감정수준에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공부를 시키는 이유가 더이상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두려움과 수치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아이들을 화나게 만듦니다. 공부하는 방법이나 시간도 어쩌면 이성적인 범위를 넘어서 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러한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의 감정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집단트라우마의 한증상일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경험하면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세대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받고, 생존을 위해서 모든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렸던 세대입니다. 그러한 아버지 세대가 지나가고 그 자녀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세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트라우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과는 비교도 할수 없는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삶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오늘은 시간을 내서 공원을 한번이라도 걸어보고 지금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해서 감사함도 느끼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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