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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감을 못받아들이는 사람들

수치감을 못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부정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투사합니다.

수치감은 고통스러운 감정이라는 이야기를 지난번 이야기에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수치감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은 가리고 숨기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 조금 더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수치감은 가릴수 없는 수치감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가릴수 없는 수치감이 있는 경우에는 두가지의 반응을 할수가 있습니다. 그 수치감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수치감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수치감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분들은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무기력하게 살거나, 아니면 그러한 수치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다른 부류는 수치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다른 자극에 의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수치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은 그 수치감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받아들일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경우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사회에서는 아무런 표현도 못하고 있다가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자신의 수치감을 투사하면서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수치감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수치감을 인정하지 않는 분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수치스러운 사건 자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사건의 의미 자체를 축소 혹은 왜곡하는 방법을 취하게 됩니다. 결국은 현실부정과 현실왜곡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현실을 살아가려면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그 상황에 맞게 의사결정을 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게 되면 현실에서 살아가는데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어느 방송에서,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계시는 어느 할머니에 대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명문대학을 나오신 분이셨는데, 삶을 통해서 여러가지 안타까운 상황을 경험하신 이후에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수 없어서 자신만의 환상을 만드신 분이셨습니다. 공항에서 노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을 부유한 집안의 딸로 여기고 있고, 자신은 똑똑하고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높으신 분이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의 초라한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자신만의 환상을 만들어 내신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수치감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는 경우는, 자신이 그러한 수치를 가질 존재가 아니라는 자만심이 있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보통 이러한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내게 됩니다. 지난번에 이야기 했던 가인과 아벨의 예에서,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극심한 수치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이러한 수치심을 통해서 반성하고 다음번에 더 잘 준비해서 제사를 드릴것을 다짐했다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인데, 이런 건강한 생각을 한것이 아니라, 그는 수치감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수치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신에, 동생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동생만 없었으면, 자신이 비교되는 상황도 안 만났을 것이고, 이러한 수치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이 이러한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모든 잘못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그들의 잘못이라고 괴변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 부모라면 자녀들은 심각한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녀들은 자신의 수치감도 아닌 부모들의 수치감을 자신의 것인것처럼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온 인생을 허비할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추가하여서, 그러한 혼동은 자신의 삶을 올바로 살아가지도 못하게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저같은 경우도,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수치와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들이 저에게 투사되었습니다. 저의 감정도 아닌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짊어지고 혼돈의 시간들을 살아오면서, 나의 감정이 무엇이고, 타인의 감정이 무엇인지 구분하지도 못하고 암흑속에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혼란함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감정을 느끼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인생은 살아있는 삶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감정을 차단함으로 해서 친밀한 인간과계를 만드는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추상적인 대화밖에 할수 없는 그런 삶을 지옥같은 외로움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중반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리고는 감정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치라는 감정은 고통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칼 융은 그림자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자신안에 있는 그림자들을 대면할수 있을때 그 사람은 성장하게 됩니다. 수치감과 두려움 등의 부정적인 그림자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삶에서 성장할수 있고 건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것들을 회피하고 자녀들에게 투사해 버린다면, 그 자녀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적어도 자신의 그림자는 자신이 마주해서 해소를 해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질때 이 사회가 더 건강해 질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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