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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서에 둔감한 이유

자신의 정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잘 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왠만큼 아픈것은 잘 참아넘깁니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이나 통증이란 것은 몸이 보내는 이상신호인데 이러한 이상신호는 몸이 지금 문제가 있으니 빨리 조치를 취하라는 일종의 신호입니다. 그런데 고통을 잘 참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신호를 참는 것입니다. 결국 몸이 보내는 신호에 제때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시간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육체에 통증이 있을때는 적당한 시점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조치를 취하는 것이 병을 키우지 않는 방법입니다.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고 고통을 느낍니다. 이러한 마음 혹은 영혼의 고통은 감정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외로움이나 심각한 수치감, 두려움, 분노등의 감정이 자신을 압도해 온다면 무엇인가 마음과 영혼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적인 어려움이 있을때는 육체에 고통이 있을때와 마찬가지로 그 원인을 찾아서 조치를 취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적 고통이 있을때, 그 원인과 치유방법을 잘못 처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몇가지 원인을 생각해보면, 첫째는 감정을 느끼고 이를 적절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감정은 상당히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따라서 눈에보이는 상처와 같이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만약 아이가 수치감이나 고통의 감정을 느껴서 부모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는데, 부모가 이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데 자신이 과장해서 인식을 했구나 하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이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부모들이 어떻게 반응을 해주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경험이 유년시절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기 어렵고 더 심한 상황까지 되면 정체성까지도 위협을 받게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자신을 다른사람과 구분해주는 독특한 모습인데, 그것은 상황에 대해서 혹은 어떤 분야에 대해서 다른사람들과 다른 고유한 감정을 갖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아이의 감정에 반응해주고 그를 인정해주는 역할은 부모의 역할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감정에 대해서 반응해주는 것에 민감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역기능 가족들 안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부모들이 제대로 해주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자신들의 감정에 압도되어서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추스르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들은 아이들의 감정에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둘째는 감정 자체에 대해서 회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애착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경우인데, 어린시절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을때 부모와의 관계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경험했거나 폭력적인 경험을 했을 경우에, 감정 자체를 느끼거나 표현하는 것에 상당한 두려운 경험을 학습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감정 자체를 느끼는 것이 상당한 고통의 감정을 유발할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감정을 느끼는것 자체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회피하게 됩니다. 결국은 감정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해야하는 첫번째 단계에도 다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감정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서, 알콜중독이나 약물중독 등에 빠지기도 하고, 이러한 감정느끼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속되면 중독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집니다. 


셋째는 어떤 감정을 느낄때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즉시 다른 감정으로 변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원래 느끼는 감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차감정을 느끼게 되어서  일차감정이 무엇이었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치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수치감 자체를 느끼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에게 분노의 감정을 투사하는 경우가 이와 같은 경우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이러한 예로, 성경에 나와있는 가인이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자, 그 수치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동생 아벨에 대한 분노로 변환시켜서 동생을 죽여버리는 죄를 지은 장면을 설명했습니다. 이때 가인의 내면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차 감정은 수치감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감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동생에 대한 분노의 감정으로 변환되었고, 그러한 분노의 감정이 동생을 죽이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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