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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언어인 감정

우리는 영혼의 소리를 인식하고 듣고 이해할수 있나요?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감동 했을때 영혼의 울림이 있는 소리 라고 하거나 영혼의 소리라는 표현을 쓰고는 합니다. 즉 깊은 감동이 있는 경우에는 영혼이 관련되어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말에 대해서는 영혼없는 소리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또는 깊은 만족감을 느낄때, 영혼이 충만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정리해보면 어떤 깊은 만족감이나 감동스러운 상황을 경험할때 영혼이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감으로 느끼는 만족수준을 넘어서서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족감이나 기쁨등은 감정적인 충만감이나 기쁨등을 통해서 전달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술을 먹었을때 즐거움이 있지만, 이러한 즐거움을 영혼의 즐거움이라고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혹은 마약이나 섹스등을 통해서 경험하는 즐거움을 영혼의 즐거움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표현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어느정도 인정을 하고 살아간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물론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사람은 육체 뿐이고 죽으면 모든것이 끝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신분들도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경험을 하는 것은 감정을 통해서 보통 하게 됩니다. 물론 감격적인 상황이 아닌 고통의 상황도 감정의 경험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심리학의 행동인지치료에서는 오감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들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기억들을 통해 해석이 되면서 감정이 만들어진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상황과 맞지 않는 감정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결국 상황에 맞는 감정이든, 상황에 맞지 않는 감정이든, 감정은 영혼의 소리라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가면 답답함을 느낍니다. 서로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알아들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의 언어인 감정도 이와 같습니다. 그 감정에 마음을 열고 잘 듣다보면 영혼이 감정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에 마음을 닫고 듣지 않는다면 그 감정이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처음에는 감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듣기 어렵지만 자꾸 듣다보면, 그리고 관심을 가지다 보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감정을 억눌러 놓았던 사람들은 더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린시절 애착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관계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감정을 억눌러 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오랜 시간동안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때는 자신의 감정을 느낄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아무리 영혼이 감정을 통해서 소리를 질러도 그것을 듣지 못합니다. 감정을 억눌러 놓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감정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 억눌러 놓았던 수많은 감정의 덩어리들을 다 풀어 놓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수십년간 억눌러 놓았던 감정들을 터져나오면 마치 쓰나미가 몰아치는 것처럼 견딜수 없는 고통을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경험해야만 하는 과정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기나긴 고통의 과정이 끝나면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느낄수 있는 시간이 옵니다. 그 다음에는 그 감정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감정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수 있을때, 비로서 대화를 시작할수 있습니다. 


윗빠사나 명상에서는 관찰자시점에서 몸의 감각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흘려보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감각이든, 부정적인 감각이든 집착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말고 그저 흘려보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쌓여있는 몸의 감각의 여러층들을 제거해 나갈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시편의 많은 시들에서 관찰자시점과 영혼의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내영혼아 어찌하여 두려워 하느냐"라는 구절에서 관찰자 시점과 그 관찰자 시점이 자신의 영혼에게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영혼이 두려워 한다는 것은 감정을 통해서 관찰자 시점이 인지한 것입니다. 즉 감정의 언어를 통해서 영혼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그러한 영혼에게 관찰자 시점이 말을 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영혼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그 존재를 찾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감정, 외로움의 감정, 그리고 슬픔의 감정이 느껴질때 그러한 감정을 어찌할줄 몰라서 다른 행동들로 그것들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느껴질때, 영혼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에게 "나의 영혼아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니?", "나의 영혼아 왜 그렇게 외로워 하니?" 라고 물어봐 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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