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떠날 나이가 가까워 오면서 정체성을 생각해봅니다.
50대 중반을 지나면서, 자연스레 제 직장생활과 정체성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아직은 한국 사회에서 평균적인 직장인의 은퇴 시점을 넘긴 나이임에도, 어떻게든 버텨가며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회사를 떠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자꾸 마음에 맴돕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관련된 유튜브 영상들에 손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직장은 남성에게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공간을 넘어섭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직장은 경제적 기반이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능력을 인정받고, 성과로 평가받으며 사회 속에서 자리를 지켜내는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진급에 실패하거나 밀려나는 일은 단순한 업무상의 좌절이 아니라, 때로는 존재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보다 어린 상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고, 생계를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은
남성으로서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하지만 “입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현실 앞에서 자존심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자신이 소속된 직장의 이름으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곤 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치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은 그렇게 나를 대신해주는 일종의 이름표처럼 기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언젠가는 떠나야 할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나는 그동안 회사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그 구조 안에 머무르면서 진짜 나 자신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구나,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자연스레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회사 안에서의 나는 진짜 나였는가?’, ‘회사를 빼고나면 나는 누가 되어야 하지? 남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재취업을 준비하거나 자영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분들께는
그런 사색의 여유조차 사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배부른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생존하기는 성공했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할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50대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이 됩니다.
회사에서의 영향력이 좋다면 모르지만, 많은 경우는 영향력이 줄어들고 건강 역시 예전 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동안 일에만 몰두하느라 가족과의 관계는 멀어졌고, 회사 밖의 인간관계도 거의 없다면, 그 시기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50대가 자라온 시대는 많은 남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의 친밀한 관계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자라왔습니다.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무감 하나로 사회에 뛰어들었고,
IMF와 2008년의 경제위기를 견뎌내었고 경쟁과 생존의 전쟁터를 살아남았습니다.
어느 날 갑작스레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 서글픔은 단지 일자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는 것 같은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지금의 50대 남성 세대는 그야말로 ‘버텨야 했던 세대’였습니다.
부모 세대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과 책임까지 떠안고, 자신의 감정은 뒤로 한 채 생존이 먼저였던 삶을 살아왔습니다.
물론 생존은 중요합니다. 삶이 유지되지 않으면 그 이후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생존만을 위한 삶은, 결국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늘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는 그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존을 위해 충분히 애써 왔습니다.
이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직장에 다닐 때 우리는 회사가 곧 나 자신이라고 느낍니다. 직책, 성과, 타인의 평가가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나’는 누구일까요.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정체성이 강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체성은 직함이나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삶의 방향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직장에서 맡은 역할과 책임을 곧 나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환경 속에서 자라왔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멀리 가기 위해서는, 이제는 멈춰 서서 진정한 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 감정은 어떤 모습인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언제 가장 행복하고 살아있음을 느끼는지.
이런 질문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년이라는 시기는 끝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