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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두가지 시각 지식과 관계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시각을 보고 어떤 언어로 표현하시나요

오늘날의 과학기술 문명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로마 문명에 뿌리를 둔 서양 문화로부터 출발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세상에는 로고스(Logos), 즉 만물의 이치를 관통하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동양적 표현으로는 ‘도(道)’와 유사한 개념입니다. 그들은 이 로고스를 논리와 언어를 통해 탐구하고자 했으며, 사물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진리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형이상학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것으로, 감각적·물질적인 세계는 그보다 낮은 차원의 영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스 문화권의 철학자들은 이 로고스를 찾기 위해 철학, 논리학, 수사학을 발전시켰고, 이 과정을 통해 ‘앎’에 대한 개념을 그노시스(Gnosis) 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깨닫는 것, 즉 이성적 사유를 통한 인식입니다.


반면 **히브리 문화권에서의 ‘앎(Yada)’**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습니다. 야다는 삶과 몸, 관계를 통해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 내면화된 삶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창세기 4:1)는 단순히 정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 즉 ‘처녀’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야다에서 ‘안다’는 것은 지적 인식이 아니라 관계적·체험적 참여를 통한 앎입니다.


이 두 가지 앎—그노시스와 야다—의 차이는 단지 언어적 차이를 넘어, 인류의 사유 구조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스적 인식론은 분석과 논리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서양 철학과 과학적 사고의 기초가 되었고, 반면 히브리적 인식은 관계성과 경험, 신앙, 공동체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오늘날 심리학과 정신건강의 영역에서도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이 차이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서 선명히 드러납니다. 기독교는 히브리적 전통 위에서 출발했지만, 예수 사후에 작성된 **신약성경은 모두 그리스어(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로써 **야다(Yada)**로 대표되는 관계적 앎과 **그노시스(Gnosis)**로 대표되는 개념적 앎이 한 자리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헬라적 언어 체계로 전해지면서, 신앙의 본질이 관계적 친밀함에서 논리적 교리 중심으로 옮겨간 측면이 생겼습니다. 이 지점이 바로 야다의 앎이 그노시스의 앎으로 전환된 역사적 변곡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 철학자들이 평생 찾고자 했던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요한복음에 등장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요한복음 1:1, 14). 즉, 로고스와 야다가 통합된 존재, 진리와 관계, 지식과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통합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을 돌아보면,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인간 관계와 내면의 세계는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지식의 폭은 넓어졌지만, 마음의 친밀함은 좁아졌습니다. 현대 심리학의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에 따르면, 어린 시절 주요 양육자와의 안정적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 관계 불안과 정서적 결핍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야다적 앎—친밀함을 통한 관계적 경험—이 결여된 결과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정신적 공허와 사회적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노시스의 한계를 넘어 야다의 앎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단순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회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온전한 인간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그노시스와 야다가 조화롭게 통합된 삶—이성이 사랑과 만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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