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내가 못 사서가 아닙니
위스키 커뮤니티를 하다 보면, 올드보틀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뭐 어지간하면 맛있겠지… 싶다가도, 이제는 없는, 시간에 의해 자연스럽게 한정판이 되어버린 올드보틀들을 구할 수가 없으니 은근히 배알이 꼴리기도 하죠. 애초에 정말로 맛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지금까지 올드보틀을 많이 마셔 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말 절대적으로 맛있었느냐? 하면 글쎼요, 절대적인 맛의 우위는 느끼지 못한 것 같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현행 보틀들이 올드 보틀에 꿇릴 이유는 딱히 없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위스키의 전반적인 퀄리티는 오히려 올랐다고 볼 수 있죠.
일단 셰리 캐스크 이야기를 해 볼까요. 과거의 셰리 캐스크가 더 좋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는 실제 음용 목적인 셰리 와인을 담았던 캐스크를 운송했던 캐스크를 위스키에 사용했고, 지금은 단지 셰리 시즈닝 캐스크일 뿐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현재 셰리 캐스크 시즈닝에 사용된 셰리는 대부분 식초로 판매됩니다. 하지만, 더 맛있는 셰리 와인을 담았다는 것이 위스키 숙성에 더 좋은 캐스크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판매용 와인을 담았던 수많은 와인 캐스크들, 그 중에서도 5대 샤또라 불리는 와인 캐스크들에 숙성된 위스키들은 극상의 맛이었겠죠.
현 시점에서 셰리 캐스크의 주류는 스카치 위스키 숙성을 위해 제작되는 캐스크입니다. 판매용으로 제작되는 셰리보다, 캐스크 시즈닝에 쓰이는 셰리가 많다고도 하죠. 현대에 와서는, 체계적인 생산공정 하에 스카치 위스키 숙성에 더욱 최적화된 셰리캐스크가 공급되고 있습니다. 즉, 위스키 숙성에 한해서는 현대의 셰리 시즌드 캐스크가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과거의 몰트가 더 맛있었다 라는 주장도 그렇게 신빙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몰트는 싱글몰트 위스키 생산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요소입니다. 수율이 더 좋은 보리 품종이 나오면, 많은 증류소들이 재빠르게 몰트 발주를 바꾸어버리죠. 몰트 1톤당 5리터 정도만 더 좋은 수율이 나와도, 수천만 리터를 생산하는 대형 증류소에 적용해보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약 5년에서 10년 주기로 새로운 몰트가 시장에 등장하고, 빠르게 시장을 점유해갑니다. 현재 시장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로리엣 품종은 불과 2017년에 나온 품종이죠.
그 보수적인 증류소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몰트라는 것은, 몰트의 품종이 주는 변화가 맛에 큰 변화가 없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탐두 증류소의 경우에는, 과거에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ppm의 피트 처리를 한 몰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특정 몰트의 품종이 그 증류소의 맛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면, 굳이 바꾸지 않았겠죠.
위스키에 쓸 보리 품종을 테스트하는 Micromalting Group의 의장인 David Griggs 박사는 증류사들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스피릿 수율’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몰트 품종에 따른 맛에 대해서는, 맛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소규모 크래프트 증류소들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하죠.
팍사레트의 사용은 특히나 거품이 많이 낀 이야기입니다. 팍사레트가 금지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팍사레트가 무슨 금지된 비술 같은 분위기를 풍기긴 합니다. 마치 너무 OP라 밴을 먹는 스킬 같은 느낌이죠. 하지만 당시를 직접 살아본, 당시의 위스키를 직접 마셔본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1974년 SMWS를 설립한 ‘Pip Hills’는 팍사레트를 사용한 위스키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팍사레트를 사용하는 건 나쁘게 숙성된 위스키에게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된 위스키의 몇 가지 캐릭터를 부여하는 방식이었어요. 원래는 영국 시장을 노린, 셰리 와인을 가당하고 색을 타는 용도의 '비노 드 컬러' 인 팍사레트이죠. 이게 좋게 쓰였을 때도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기대가 없는 대중' 들에게 받아들여질 정도였고, 나쁘게 쓰였을 때는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마시지 않을 끔찍한 위스키를 만들어냈죠. 팍사레트는 절대 좋은 셰리 캐스크 숙성의 대체재가 될 수 없어요.”*
즉, 위스키 애호가들이 꿈꾸는 마법의 MSG 팍사레트는 허상이라는 이야기이죠.
위스키 업계의 질적 성장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이후 증류산업이 자동화되고, 업계는 대기업 위주로 재편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정 품질 이하의 원액을 공급하던 증류소들은 폐쇄되었고, 남은 증류소들은 효율성과 효과성 면에서 꾸준한 연구개발과 업그레이드를 진행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들 또한 많이 개발되었죠. 잘 알려진 것만 해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캐스크 피니싱, STR, 리쥬베니이티드 캐스크 등 다양한 기술들이 최근 20년간 개발되었고, 또 적용되었죠.
특히, 이러한 기술들은 캐스크의 질적 업그레이드를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경제적 업그레이드이기도 했습니다. 숙성하는 캐스크에 드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캐스크의 품질은 유지해냈고, 꾸준히 데이터를 쌓아 가면서 기술을 성숙시켰습니다. 이렇게 개발된 기술들이 위스키 업계에서 공유되고, 체계적인 생산 시스템 하에서 확산되면서 위스키 업계의 전반적인 스텝업을 가능케 했습니다.
즉, 우리는 과거에 비해 낮은 원가로 더 좋은 품질의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위스키의 가격 상승이 억제되었지만, 그 가격 상승을 억제한 원동력이 체계화된 생산과 효율성 증대로 인한 것이니까요.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USB나 하드드라이브 시장을 생각해 보면 성능은 늘어났지만, 가격은 계속 싸진 것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미래에 나올 위스키들은 더욱 훌륭한 품질의 위스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에 위스키 시장이 불황을 맞아 쌓아두었던 캐스크들을 이후 반출했고, 이로 인해 좋은 품질의 위스키가 생산되었다면, 현재 새로운 불황의 초입에 있는 위스키 시장이 또 캐스크 비축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요.
즉, 올드보틀이 맛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위스키 시장의 사이클에 따른 결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에 나올, 지금 비축되고 있는 캐스크의 위스키들은 과거에 비해 발전한 숙성 기술과 캐스크 가공 기술과 결합될 것입니다. 과거의 보틀보다 더 훌륭한 품질이 미래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죠.
어쩌면 올드보틀을 마시는 ‘우리’가 착시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올드보틀 전체를 마셔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있는 위스키들의 전체적인 풀에 비해.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올드보틀의 풀은 확연히 적을 것입니다. 표본집단의 크기가 다르죠. 이로 인해 인식의 오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오류들은 전염성 강한 정보가 되어 커뮤니티에 퍼져나갑니다.
첫 번째로, 생존편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위스키를 마시고 또 모으는 우리네의 습성은 비슷합니다. 이것 저것 마셔 보다가, 맛있는 게 있으면 겨울을 대비하는 다람쥐마냥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하죠. 그리고 이렇게 모은 술들을, 조금씩 아껴 마십니다. 어디의 누군가들은 평생 다 못 마실 양을 차곡차곡 쌓아 놓기도 하죠.
이렇게 아낀 술이 20년, 30년 뒤 올드바틀로 주목받게 될 것입니다. 아껴놓았기 때문에 좋은 상태로 매물이 풀리고, 사람들이 찾을 수 있게 되죠. 즉, 맛있는 것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올드보틀이라 맛있는 게 아니라, 맛있는 게 올드보틀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거죠. 지금 여러분이 쌓아 놓은 술들도, 20년 30년 뒤 올드보틀로 추앙받을지 모르는 일이죠.
두 번째로, 표본선택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올드보틀을 마셔볼 때, ‘맛있는 것’ 을 추천받아 마시는 경우가 많죠. 무턱대고 오래되어보이는 바틀이라고 해서 마시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예컨대, 일본이나 대만, 유럽의 바를 가서 메뉴판을 보면 ‘좋은 평을 알고 있었으나 마셔보지 못했던 것’을 마셔보는 셈입니다. 이미 평이 좋은 것을 마시는데 맛이 없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용은 한정되어 있으니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죠. 1950년대에 이미 위스키 증류소가 100곳이 넘었지만, 회자되는 올드바틀들은 그 중에 소수입니다. 소수의 유명 증류소만이 희귀 올드보틀로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
세 번째로, 현행 보틀에 대한 평가가 충분치 않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평점 사이트로 국내, 혹은 국외의 위스키들에 대한 평가조차 모두 볼 수 있는 시대에 이게 무슨 소리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시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고전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처음부터 고전 명작의 칭호를 달고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이라는 곡은 발매 초기에 음악잡지 ‘Sounds’에게 지루한 정신분열증 같은 곡이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곡 중 하나라는 평을 듣죠. 모두가 잘 아는 영화 ‘탑건’ 은 어떤가요? 메타크리틱 점수 50점, 로튼토마토 58%, IMDB 평점 6.9 등 그닥 좋은 평은 아닙니다. (1986년에는 월드와이드웹이 없었으니, 그 이전 평론가들의 평을 취합한 수치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평을 받고 있나요?
즉, 우리가 공인하는 명작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평가가 쌓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면서 탄생하게 됩니다. 영화나 음악과는 다르게, 위스키는 체험에 진입장벽이 높고, 그래서 평가가 쌓이고 공유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고 또 느리죠. 우리가 지금 마시는 현행 보틀들도 시간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몇몇 보틀들은 명작으로 평가받아 모두의 기억에 남겠죠. 시간적으로 너무 가까이 있는 우리로서는 지금의 위스키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현행보틀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네 번째로, 인간 본성의 ‘자랑하고 싶은 마음’ 이 있겠죠. 솔직해집시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마음이 있죠. 2000년대, 2010년대 인터넷 커뮤니티 발달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되었고, 자랑의 대상은 희소한 것들이죠. 초고가의 한정판 보틀이나,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구형 보틀들 말입니다. 현행의 다소 희소한 보틀링이 충분히 맛있어도 자랑하기 힘듭니다. (어지간히 고가품이 아니면 말이죠) 모두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모 독립병입사의 모 바틀링이 기가 막히게 맛있어도, 그걸 자랑해봤자 아~그렇구나 하고 말 테니까요.
하지만 올드바틀은 다르죠. 모두가 알지만, 아무나 구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유명한 브랜드의 명품처럼요. 모두가 알기에, 어느 정도의 선망과 기대는 모두의 마음에 있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기가 막히게 맛있다’ 는 모두에게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자랑하기도, 그 자랑을 믿기에도 현행 보틀링보다 훨씬 좋은 조건입니다.
이런 완전하지 않은 정보들, 기술 발전에 대한 간과, 인식의 오류 등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현재의 위스키들은 과거에 비교해 보아도 딱히 모자란 것이 없는 훌륭한 위스키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현행 보틀들이 올드 보틀들보다 별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요?
그건 어쩌면 우리가 불공정하게 두 대상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상술했듯, 위스키의 가격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극소수의, 투자 대상이 되는 위스키들 몇몇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위스키들은 물가상승률에 비해 적은 폭의 상승을 보였거나, 가격이 유지되었습니다. 지금의 위스키가 더 싸다는 말은, 과거의 사람들은 위스키를 ‘더 비싸게 구매했다’ 라는 말이죠. 즉, 당시 위스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쌌고, 제조사에서 제품을 만들 때도 훨씬 고급스러운 포지션으로 타게팅했을 것입니다.
전 편에서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을 기준으로 1990년대와 지금의 물가 차이는 약 3배 정도라고 이야기드린 바 있죠. 1990년대의 5만원은 지금 기준으로 약 15만원, 7만원은 약 21만원, 10만원은 약 30만원이네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12년급 올드보틀과 현재의 18년급 보틀을 비교해야 가격적으론 정당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현행보틀은 올드보틀보다 더 열화된 것일까요?
다른 관점에서, 30년 전의 12년급 올드보틀이 현재의 12년급 보틀의 3배 가격의 가치가 느껴질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상술했던 기술과 산업의 발전 덕분이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고점’ 은 올드 바틀 위스키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죠. 수십 년간 사람들의 평이 쌓이며 걸작으로 인정된 위스키들은 당연히 올드 바틀 위스키들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전반적인 위스키들의 품질은 현대에 와서 더욱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선된 위스키들의 기반 위에 시간과 평가가 쌓이면, 현대에 우리가 마시고 있는 위스키 중에서도 후일 명작,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이 반드시 나오겠죠. 그러한 위스키가 유명한 증류소에서 나온 최고가의 바틀이 될지, 신생 증류소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보틀링이 될지는 그때 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가 더 좋았다는, 좋을 것이라는 향수에 기대기보다는 현재 주어진 것들을 즐기세요! 세상은 넓고, 즐길 위스키는 그 어느 때보다 많고, 그 품질도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