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사이드의 심장
스페이사이드의 여러 증류소들을 차로 다니다 보면, 종종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대한 숙성고 벽에 십여 미터의 알파벳이 큼직하게 박힌, 벤리악 증류소의 숙성고입니다. 스페이사이드의 주요 도시, 엘긴의 초입에 있는 이 증류소의 숙성고는 높은 산이나 언덕 등이 따로 없는,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스코틀랜드의 풍광 덕분에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비지터 센터도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얀 인테리어의 벤리악 비지터센터에는 벽난로와 테이스팅 바, 편안한 소파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고, 벽장에는 벤리악의 희귀 보틀들이 구형과 신형을 가리지 않고 늘어서 있습니다. 기프트 샵도 따로 공간을 마련해 두었고, 벤리악 싱글 캐스크를 비롯해 인테리어 용품, 칵테일 용품도 판매하고 있습니다.하루에도 몇 번씩 증류소 투어를 진행하고, 이 투어도 비지터 센터에서 출발해 비지터 센터에서 끝이 납니다.
벤리악은 알게 모르게 존재감이 큰 증류소입니다. 빌리 워커가 증류소를 인수할 때도 ‘벤리악을 필두로‘ 글렌드로낙과 글렌글라사를 인수했고, 브라운포먼 또한 벤리악을 필두로 글렌드로낙과 글렌글라사를 인수했습니다. 최근 글렌글라사 증류소가 생산 중단되면서 생산라인을 벤리악과 공유하게 된 것을 보아도, 세 증류소의 생산량을 비교해 보아도 벤리악 증류소가 세 증류소의 거두 취급인 것은 명확해 보입니다.
그러나 벤리악이 시장에서 존재감이 대단한 증류소는 아닌 듯합니다. 셰리캐스크, 와인캐스크, 포트캐스크 등 다양한 캐스크를 사용하고, 피티드 원액도 생산하며 정말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있는 벤리악이지만, 주변에서 위스키를 추천할 때 1순위로 추천되는 곳은 아닙니다.
이는 벤리악이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증류소이기 때문입니다. 1898년에 롱몬 증류소의 생산량을 보충하기 위해 증류소를 개소했다가 , 2년 만에 바로 폐쇄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후 최근에 와서야 재개장한 증류소이다 보니, 명확한 캐릭터가 잡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벤리악은 폐쇄되어 있던 기간에도 롱몬을 위한 몰팅을 진행하고는 있었습니다. 현대의 ‘포트 앨런’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죠. 당시 씨그램 (현재의 페르노리카) 는 아일라에 증류소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티드 몰트를 벤리악에서 수급했다고 합니다.
이 벤리악을 주목한 것이 당시 번 스튜어트에서 일하고 있던 ‘빌리 워커’ 입니다. 빌리 워커가 회사를 나온 뒤, 남아공의 투자자들과 컨소시엄을 조직해 벤리악을 인수했죠. 본격적인 싱글 몰트 증류소로서의 벤리악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벤리악의 라인업은 좋게 말하면 다양하고, 나쁘게 말하면 지저분합니다. 과거 여러 증류소들과 위스키 브랜드들에게 원액을 맞춤 제공하던 벤리악의 역사를 반영한 것인지, 매우 많은 종류의 위스키 라인업이 존재합니다.
생산하는 스피릿 레시피만 해도 세 가지입니다. 일반적인 더블 디스틸드 스피릿, 피티드 스피릿, 트리플 디스틸드 스피릿. 거기에 셰리, 버번, 포트 캐스크만 쓴다고 해도 수도 없이 다양한 조합이 나옵니다. 추가로 소테른, 마데이라, 럼 캐스크 피니싱 등 캐스크 피니싱까지 하면 정말 정신없이 많은 정도의 제품이 출시됩니다. 실제로, 독립병입이 아닌 오피셜 제품으로 출시되기도 했구요.
그래서, 벤리악은 과거의 보틀링들의 평점을 보고 현재의 퀄리티를 예측하기 어려운 증류소입니다. 위스키베이스 등 과거의 명품 보틀링들이 좋은 평점을 기록했다고 한들, 어떤 레시피로, 어떤 캐스크로 만들어졌는지가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맛을 낼 테니까요. 즉 고려할 게 너무나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최근 레이첼 베리가 지휘봉을 잡은 이후로는 라인업을 정리하는 듯해 보입니다. 일반 더블-트리플 디스틸드 몰트를 사용하는 더 텐/ 더 투엘브, 그리고 피트 처리된 몰트를 사용하는 더 스모키 텐/ 더 스모키 투엘브로 나뉘었고, 더 고숙성 라인업인 더 식스틴/더 투엔티원/ 더 투엔티파이브/ 더 서티/ 더 포티는 스모키 버전이 없습니다. 나름 저숙성에서는 선택지를 늘리고, 고숙성은 정리한 느낌이죠.
독립병입자의 입장으로서는, 캐스크를 고르기 조금 까다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이건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데, ‘맛을 보고’ 캐스크를 사기가 거의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캐스크 딜러들은 캐스크 캐스크 샘플을 보내주고 고르라고 하기보다는, 엑셀 파일만 보내주고 고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술을 공짜로 줄 이유가 하등 없을 뿐더러, 정말 맛있는 것들은 엑셀 파일만 보내주어도 문제없이 잘 팔리거든요.
그런데 벤리악은 캐스크와 숙성연수만 보고서는 어떤 맛일지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특정한 타입의 오피셜 보틀링을 통해 캐릭터를 확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예컨대, 벤리악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14년이 매물로 나왔는데, 그것이 더블 디스틸드 원액인지, 트리플 디스틸드 원액인지 알기가 어렵고, 캐스크 딜러의 ‘이거 맛있어’ 라는 말을 믿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브룩라디처럼 스피릿 타입에 따라서 이름을 바꿨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말이죠.
맛이 예상이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 번에 몇천만원 이상의 현금이 묶이는 것이 캐스크 거래이다 보니 더욱 그렇죠. 물론, 벤리악이 싱글캐스크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와 포텐셜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잘만 팔리긴 합니다.
다만, 레이첼 베리가 지휘봉을 잡고 라인업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꽤나 괜찮은 전망이 있다고 보입니다. 십 년 정도면 충분히 벤리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지요. 독병으로 나오는 레시피도 좀 더 체계적으로 바뀔 것이고, 사람들은 벤리악이라는 증류소가 라벨에 적혀 있을 때 어떠한 맛일지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라인업 리뉴얼로 인해 사용처가 없어진 양질의 캐스크들 또한 독병 시장에 활발하게 풀릴 수도 있죠. 거기에 더해, 브라운포먼이라는 주류 공룡의 관리와 마케팅이 이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벤리악은 다음 위스키 붐의 스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