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니싱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피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by 위스키내비

캐스크 피니싱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한 캐스크에서 숙성된 위스키들 다른 캐스크로 옮겨담아 숙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리필 캐스크에서 숙성하던 위스키를 퍼스트필 캐스크에 옮겨담아 숙성하거나, 버번 캐스크에 숙성하던 위스키를 셰리 캐스크에 옮겨담아 숙성하는 등 여러 용례가 있습니다.

bt_OYCO8GNHRS9M9I9LOR8X98BDNWLQM.jpg 캐스크 피니싱 위스키

흔히, 캐스크 피니시는 ‘풀숙성‘ 이 아니라는 이유로 저평가받고는 합니다. 저렴한 버번 캐스크, 혹은 리필 캐스크의 원액을 셰리 캐스크로 ‘덧칠’해서 비싸게 팔려고 하는 수작질로 평가받기는 하죠. 얼핏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우리는 위스키의 맛을 보고 사지 않습니다. 라벨, 그리고 위스키의 색을 보고 판단하게 되죠. 만약 셰리 캐스크에 피니싱해서 매력적인 색을 내 준다면, 몇몇 소비자들은 이에 현혹되어서 살 수 있겠죠.

%EC%88%9C%EC%88%98%EC%A3%BC%EC%9D%98%EC%9E%90_11.jpg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캐스크 피니싱이 그렇게 좋지 않은 기술이고, 위스키 업계에서 소비자를 기만하는 대표적인 수법 중 하나라면, 위스키 메이커들은 이를 부끄러운 요소로 여기고 숨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발베니의 데이비드 스튜어트, 글렌모렌지의 빌 럼스덴 등 위스키 업계의 거인들이 앞다투어 자신이 개발한 제작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리랙킹이나, 팍사레트의 경우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리랙킹이야 캐스크의 유지보수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쳐도, ‘치트키’ 라는 소문이 있는 팍사레트는 어쨰서 없을까요.

Dr-Bill-Lumsden-Director-of-Distilling-Whisky-Creation-and-Whisky-Stocks-The-Glenmorangie-Company-e1675896768300.jpeg
balvenie-david-stewart-dcs-compendium-chapter-3.jpg?w=1000
빌 럼스덴 (좌) 데이비드 스튜어트 (우)

위스키 보틀, 혹은 마케팅 자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캐스크 피니싱은 SWA 규정상 필수 표기사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표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베니의 경우에는 ‘더블우드‘ 같은 새로운 라인업을 만들면서까지 캐스크 피니싱을 강조하죠. 글렌모렌지의 경우에는 엔트리급 라인업 3종을 모두 캐스크 피니싱 라인업으로 채웠습니다. 독립병입 업체들 또한 ‘캐스크 피니싱’ 을 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위스키 메이커들은 ‘캐스크 피니싱‘ 을 했다는 사실을 일종의 마케팅 포인트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캐스크 피니싱을 왜 하는 것일까요?

캐스크 피니싱은 1980년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글렌모렌지와 발베니뿐만 아니라, 디아지오 등 위스키 대기업들도 시도한 바가 있죠. 일례로, 1986년 출시된 ‘싱글톤 오브 오크로이스크‘ 는 이미 10년 숙성한 버번 캐스크 원액을 2년간 셰리 캐스크에서 2차 숙성한 제품이었습니다. ‘캐스크 피니싱’ 을 직접적으로 홍보하거나,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 ‘최초의 캐스크피니싱’ 은 발베니와 글렌모렌지의 자랑거리가 되었죠.


linkwood-26-year-old-1981-cask-strength-collection-202797_grande.jpg?v=1741971743 디아지오의 캐스크 피니싱 실험작

이뿐 아니라, 디아지오는 링크우드 증류소에서 12년 숙성 원액을 가지고 셰리/포트/마데이라에서 각각 14년을 추가 숙성하는 실험을 하는 등, 캐스크 피니싱 공법에 상당한 실험과 투자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글렌모렌지의 경우, 1923년부터 같은 주인 아래에 있던 글렌모레이 증류소에서 캐스크 피니싱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 증거로, 1999년에 글렌모레이에서 샤도네이와 셰닌 블랑 와인 캐스크 위스키를 출시한 바 있죠. 발베니는 자신의 증류소에서 직접 실험한 후, ‘발베니 더블우드’ 를 비롯해 많은 정규 라인업들을 캐스크 피니싱 시리즈로 채워넣었죠.

여러 대형 제조사들이 캐스크 피니싱을 ‘정규 제품화’ 할 정도로 대규모 공정화했다는 것은 캐스크 피니싱이 ‘유의미하게’ 위스키의 맛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죠.

사실, 캐스크 피니싱이 맛을 더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공공연한 사실이죠. 다만, 오해가 있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EC%96%91%EC%82%B0%ED%98%95_11.jpg

“캐스크 피니싱은 풀 머츄어링의 염가형 카피일 뿐이다” 라는 명제입니다.

실제로, 캐스크 피니싱을 사용하면 비싼 셰리 캐스크와 와인 캐스크의 사용 기간이 훨씬 짧아지고, 숙성 시간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리필 캐스크, 혹은 버번 캐스크에 숙성할 수 있기 때문에 원액의 단가가 저렴해진다는 것이죠. 맞는 말입니다. 쓰고 보니 다 맞는 말 같기는 한데…

중요한 것은, 과연 셰리 피니싱을 해서 퀄리티의 유의미한 저하가 일어나는 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캐스크 피니싱을 한 것보다, 풀 머츄어드가 더 퀄리티가 높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막상 숙성을 하다 보면, 예상 외로 숙성이 빠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상 외로 느리게 진행되는 경우도 많죠. 게다가, 숙성 정도는 선형적으로 결정되지도 않습니다. 숙성이 급감속하는 경우도 있고, 급발진하는 경우도 있죠. 이 중에서, 급감속을 하거나 예상보다 숙성이 느려지는 것은 괜찮습니다.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컨트롤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캐스크에서 과숙되어 오버킬이 난 원액을 그 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렵죠. 마치 물을 덜 넣은 라면은 물을 부으면 되지만, 한강라면은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BvRZ6cHTT2wW1qb9akVp3duPzxESWFXNQdibUv_OtdIQXzIcUGvfk_1P47UD2-JmtRltYzjqsha2q3_SJ7Doag.webp 한강은 도도히 흐른다

이 캐스크 오버킬을 최대한 적게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위스키 숙성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숙성된 캐스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를 블렌딩하는 것에도 큰 어려움이 있죠.

실제로, 숙성의 초기 단계부터 퍼스트필 캐스크를 사용할 경우, 캐스크의 사이즈에 따라 10년 내에도 과숙성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위스키는 복합적인 꽃, 과일 등 에스테르의 뉘앙스가 스며들기 전에 강렬한 우디함과 전 숙성주의 노트를 흡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캐스크 피니싱을 할 경우에는 이러한 위험을 어느 정도 회피할 수 있습니다. 버번 캐스크, 혹은 리필 캐스크에서 충분한 깊이감을 흡수한 뒤, 그 이후 퍼스트필 캐스크에서 숙성해 위스키의 맛을 단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죠.

Cask-Influence-over-time.webp?v=1689759530

이러한 캐스크 피니싱을 통해 숙성감을 끌어올릴 타이밍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즉 ‘캐스크 오버킬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 이 바로 캐스크 피니싱의 가장 큰 강점일 수 있습니다. 캐스크 피니싱을 통해 위스키메이커들은 대규모 생산공정에서 ‘위스키의 수율’ 을 그게 끌어올릴 수 있고, 이는 곧 양질의 원액을 얻는 데 드는 비용이 감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지난 사설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소비자 물가와 비교해 위스키의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고 했었죠. 어쩌면 이러한 생산과정에서의 효율화가 이를 가능케 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C%88%98%EC%A0%84%EB%85%B8_1.webp

그렇다면, 캐스크 피니싱은 실제로 단가를 줄이는 데 사용되는 걸까요? 사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캐스크 피니싱은 엄연한 ‘추가 공정’ 이고, 이를 수행하는 데에 추가적은 자원이 투입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비단 인력과 캐스크 수급뿐만이 아니라, 원액에서도 상당한 손실이 나죠. 캐스크의 원액을 다른 캐스크로 옮겨 담을 때, 약 20리터 정도의 원액을 새로운 캐스크가 “빨아먹습니다”. 배럴 내지는 혹스헤드의 경우에 이렇죠. 단순 계산으로, 원액의 10% 정도를 아예 손실하는 결정인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기준으로 약 연 1~2퍼센트의 증발을 하니, 약 10년에서 5년 정도의 숙성한 만큼 원액 손실이 나는 것이죠.


그렇기 떄문에, 독립병입자를 비롯한 위스키메이커들은 캐스크 피니싱 표기를 꼬박꼬박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법적인 규제나, 의무사항으로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면, 캐스크 피니싱은 ‘더 좋은 맛을 위한 노력’ 이라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topwhiskies-independent-whisky-bottler.jpg?v=1714234114&width=1500 위손실을 알아다오

캐스크 피니싱이 흔하지 않았던 과거에도 ‘리랙킹’ 이라는 이름으로 숙성 중 원액의 캐스크 변경을 하고는 했었습니다. 다만, 대부분 그러한 리랙킹 과정은 캐스크의 유지/보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면, 캐스크 피니싱은 위스키의 향미에 주는 변화를 노리고 행해진다는 것이 다른 점이죠. 물론, ‘리랙킹’ 또한 같은 타입의 캐스크에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기는 합니다. 글렌알라키를 비롯한 ‘셰리 위스키’ 로 최근 시장에 데뷔한 위스키들을 보시면 알 수 있죠.

20210506_glenallachie_009930jan23111401.jpg 30년 숙성하는동안 셰리벗에 500병뽑을만큼 위스키가 남아있는 마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스키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캐스크 피니싱은 ‘실제로 맛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싱글몰트 증류소의 오피셜 라인업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줄 정도로 ‘대규모에서’, ‘유의미하게’ 도움이 됩니다. 즉, 일종의 ‘맛을 개선하기 위한 공정’ 으로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스키메이커들은 5년~10년어치의 원액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라도 캐스크 피니싱을 진행합니다.


즉, 정리하자면 캐스크 피니싱은

생산 공정을 안정적으로, 효율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개별 캐스크들의 맛을 끌어올리는 데/ 셰리 캐릭터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단기간에 많은 양의 원액 손실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위스키메이커들은 그러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합니다.


즉, 캐스크 피니싱이 ‘염가에’ ‘풀 셰리 캐스크’ 를 모사하는 방법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염가도 아닐 뿐더러, ‘풀 셰리’ 에 비해 맛이 열화된다는 근거도 없고, 무엇보다 우리가 ‘풀 셰리’ 라고 생각하는 위스키들이 사실은 ‘풀 셰리’ 가 아닐 가능성도 꽤 크죠.
그러니 우리는 피니싱에 대한 편견을 가지기보다는, 위스키를 숙성하는 ‘신기술’ 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힌 ‘순혈주의’ 를 넘어서면 새로 도전하고 마셔 볼 것들이 훨씬 많아질 테니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Distillery Story-글렌오드 증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