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애인이랑 그냥 노닥거리기나 하려고 만나냐는 말에, 걔도 참 생각 없는 애다-라는 말에, 나는 그 길로 곧장 내 애인에게 달려가 이별을 고했다. 애인도 나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등어 한 손 만들듯이 한데 엮여서 ‘생각 없는 애들’로 취급되었다. 나, 그러니까 썩은 고등어는 그 분노와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때깔 좋은 간고등어의 품을 단박에 빠져나왔다. 그렇게 단칼에 헤어지는 일로, 내게 잔소리를 한 사람에게 일종의 경고를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가만히 웅크려 사는 나를 자꾸 자극하면, 나는 언제고 내 삶을 파국으로 치달아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렇게 파탄 낸 관계를 무언 시위의 피켓처럼 들어 올리고, 나도 상처 입고 너도 상처 주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야말로 역겹고 혐오스러운 허세였다.
헤어지자는 내게 당신은 아무런 이유도 뭣도 묻지 않았다. 그냥 쓴웃음과 함께 눈물만 지었다. 한참을 그런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근데 나는 왜 오빠가 이럴 걸 알았지’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밤에 헤어졌다. 밤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고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는 ‘오빠는 겁이 많지요?’라고 물었다. 거기에 원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다정함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나를 찾아왔을 때도, 나 때문에 당신까지 욕먹는 게 싫다던 내게, ‘내가 괜찮다는데도 안 돼요?’라고 했고 나는 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물음에는 원망도 조금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몇 해 간간이 들려오던 소식조차 뜸해질 때쯤, 언젠가 당신이 살던 집 대문 앞을 서성이다가 만용을 부리며 초인종을 눌렀던 적이 있다. 거기서 나온 건 뜻밖에도 어떤 젊은 부부였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당신이 그곳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행방이 묘연해진 당신을 두고, 소식을 종종 전해주던 누군가는 당신이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고도 했고, 다른 나라로 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당신이 이제는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그런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제발 그녀가 좋은 남자를 만난 것이기를, 어디 저기 먼 나라, 나성으로 간 것이길, 서반아로 간 것이길, 햇살이 뜨거운 땅에서 과수원을 하는 것이길, 당신이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조그만 창문이 달린 마카롱 가게를 하고 있는 것이길, 우리가 평생 만날 수 없는 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길, 빌고 또 빌었다. 꿈에서도 종종 빌었다. 거기선 왠지 미안하다면서 비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어떤 슬픈 사실들을 직시하며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에 마치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떠밀려서 이별한 척했지만, 그건 사실 다 내 선택이었다. 나의 낮은 자존감이었고, 나의 초라한 날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저지른 만행이었다. 나 때문에 그녀가 욕먹는 것이 싫어서 분노한 척, 삐뚤게 나가는 척했지만, 그건 그냥 도피였다. 상처를 힘껏 떠안고 당신을 껴안아 줄 각오 같은 거, 사실 내게 그런 건 없던 것이다.
가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하며 산다. 돌아가지 못한다면 늘 미안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산다. 내가 만일 내 삶의 어디선가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하거나 서성이고 있다면 그건 오직 내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탓이다. 사랑의 탓이 아니고.
내가 만약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고, 조금 더 사랑해 보면서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 내게 무참히 다정했던 것들 덕분이다.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누군가의 손길과 온기는 나를 어떤 사랑 쪽으로 힘껏 떠밀어준다. 겁내지 말라고, 용기 내 보라고.
글을 쓸 때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일이다.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사랑할 때 중요한 것 역시 사랑을 하는 일일 것이다, 상처받지 않을 준비를 하는 일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