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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Sep 14. 2021

장마가 그치고 나서야 알았지

어느 해 8월의 일이다. 난 출근길 날씨가 어떨지 눈 뜨기 전부터 알 수 있다. 내 침상 머리맡에 창문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얼마나 눈부시냐에 따라 그날의 맑음을 알 수 있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얼마나 거세냐에 따라 강우량을 짐작할 수 있다. 어젯밤처럼 후드득-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라면 꽤 비가 오는 날이다. 오늘은 기상 알람이 울릴 시간인데도 아직 어둑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비도 그친 것 같다.


상상해 보자,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눈뜨고, 기분 좋은 미소 지으며 기지개를 켜고 산뜻하게 아침을 출발하는 모습을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틀렸다. 실제론 오늘처럼 이렇게 어둑한 날이 훨씬 컨디션이 좋다. 맑은 날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새벽부터 선잠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커튼을 치면 되겠지만 내 방 커튼은 연한 녹색의 블라인드 형태라서 여름의 강렬한 광선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나처럼 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따사로운 날이 오히려 지독하게 느껴지고, 어둑한 날에서 평온을 얻는다. 말이 길어졌지만 요약하자면 날이 흐려서 잘 잤다는 말이다.


출근 준비하는데 엄마가 “오늘 우산 챙겨서 나가라, 이따 비 온다더라”라고 말해준다. 나는 일기예보를 잘 안 보는 편이다. 왜, 언제부터 이런 습관이 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종종 날씨를 알려주는 게 편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여자애도 일기예보를 잘 안 봤는데(무시하는 쪽에 가깝긴 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더 안절부절못해서 겉옷이라도 하나 더 챙겨가곤 했다. 더 사랑하는 쪽이 상대의 날씨까지 챙기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도 이건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챙겨주는 쪽은 사랑할 대상이 있어서 좋고, 받는 쪽은 보살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니까, 결국 둘 다 승자가 된다.


만일 누군가 일기예보를 잘 안 보는 습관 때문에(나처럼) 번번이 낭패를 본다면,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자신의 주변을 잘 둘러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알게 모르게 내 하루를 챙겨주고 있었서 생긴 습관인지도 모른다. 일기예보를 깜빡해서 소나기를 쫄딱 맞거나, 갑자기 쌀쌀해지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보살핌 받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니? 오히려 기쁜 일이 아닌가?


그런 기쁨을 뒤로하고 일단,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 엄마에게 "요즘 비 너무 자주 오는 거 같지 않아?" 하고 투덜댔다. 그런데 ‘그래야 농사짓는 사람들이 풍년이지’-라는 공감 능력 제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의 공능제에 발끈해서 생떼라도 한번 부려보려다가 출근이 늦어질 거 같아서 얼른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기 전에 잠시 멈칫한다.


'지금 우산을 챙겨가?, 말어?'


내 머뭇거림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한 엄마가 우산 하나 가져가는 게 뭐 그리 불편하냐면서 타박했지만, 아버지 차에 편하게 앉아서 출근하는 엄마는 모른다. 엄마는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며 가겠지만, 출근길 2호선은 그야말로 인간의 숲이다. 누가 도시는 차갑다고 했는가? 서울에 살아보면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 서로의 온기가 얼마나 불쾌한지 알게 될 거다. 그 후텁지근한 틈으로 우산이 하나 더 비집고 들어온다? 이건 단순히 귀찮음의 문제가 아니다. 서양의 어떤 예술가가 죽음 이후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관 뚜껑 닫고 48시간을 보내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틀 뒤 관에서 살아(?) 나온 그는 인간에게 한 뼘의 공간이 더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토로했고, 그날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트라우마로 1년을 더 고생했다고 한다. 단 한 뼘의 공간, 그래 이건 인간 존엄의 문제다. 그리고 얼마 전 선배가 내게 "XX아, 너도 승진해서 이제 밑에 후배들도 있는데 너무 가볍게 굴지 말고 무게 좀 있어 보여야지"-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한 뼘 공간도 없이 끼여서 출근한 선배에게 위엄 같은 게 느껴질 리 없다. 나는 당당히 우산을 내려놓고 현관문 손잡이를 비틀어 돌린다.


"야! 우산 가져가야지!!"


빽 소리 지르는 엄마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나서며 변명한다.


"아 사무실에 하나 있어!"     


잔소리가 더 들리기 전에 후다닥 나선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간다. 


'그래 이건 존엄의 문제라고. 엄마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잠시 후...)

지옥철에서 내리고, 강남역 2번 출구로 나온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우산을 편다. 어라?     


'이런, 씨이발...'


욕이 절로 나온다. 심지어 내가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 거세게 쏟아진다. 나는 비에게서 '야 저기 우산 없는 놈 온다 ㅋㅋ'라든가 '아유, 왜 이제 왔어 한참 기다렸네' 혹은 '응 우산 없는 놈 어서 오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 피해의식인가? 고민하며 사무실로 뛰어갔다. 사무실까지는 10분 거리지만, 10분 동안 맞는 비의 양은 생각보다 많았다. 측우기도 일다경(15분) 동안 잰다는데. 10분 정도면 볼 장 다 볼 양인 것이다. 비를 쫄딱 맞고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안녕하십니까"라고 한껏 목소리를 낮게 깔고 인사해 봤지만 그 어디에도 선배의 위엄은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다. 머쓱해진 나는 얼른 화장실로 가서 핸드타월로 머리를 털었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다 젖는 건.

      

나는 원래 맑은 날 외에는 다 싫어했지만, 비 오는 날 만큼은 좋아하게 됐다. 원래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애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길래, 같이 좋아하는 척을 했다. ‘남자와 여자의 101가지 연애 속마음’ 같은 책에서 공감이 그녀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최고의 출발선이라고 적혀 있어서,  비만 오면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척을 했다. 돌이켜 보면 공감을 한 게 아니라 그냥 공감병 환자 같은 짓을 했다. 남자의 ‘척’이라는 건 꽤나 허술한 부분이 있어서 예민한 여자의 촉으론 금세 눈치챘을 것 같다. 그냥 자기한테 잘 보이고 싶은 남자의 마음이 안쓰러워서 속아준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신기한 건, 그때 이후로 진짜 비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척을 오래 했더니 어느새 진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좀 믿는다. 왜 예전에 한 도둑이 도둑질하러 절에 들어갔는데 잡히기 싫어서 중인 척했다가 몇 년 뒤에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되었다는 민담처럼 말이다.


언젠가 그 애와 이별할 것 같던 날에도 비가 왔다. 장마철이었다. 나는 무작정 우산을 들고 그 애를 보러 나갔다. 그녀가 했던 말 중에 예전에 사귀던 사람이 뜬금없이 마중을 나와서 좋았다고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궂은 날씨에 기약 없이 그녀를 기다리는 모습이 퍽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도 이런 낭만에 휩싸여 나를 다시 좋아해 주길 바랐다. 그날, 내리는 비가 아직 땅에서 흐르는 물웅덩이를 때렸다. 위에서 내리는 비보다 아래서 튀어 올라오는 비에 더 많이 젖었던 것 같다. 비가 땅에서 하늘로 내렸다. 우산을 쓰나 마나 한 날이었다. 허탈함 반 짜증반인데 왠지 그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웃다 보니까 진짜 웃겨서 이 장대비가 좋아졌다.


아쉽지만 나는 그날 그녀를 만날 수 없었고, 우리의 이별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럼 비가 억수로 오던 그 장마철이 싫어질 법도 한데 희한하게도 그렇지 않다.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 번 좋아지면 그걸 다시 싫어하게 되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 애를 만난 이후로 비 오는 날이 좋아졌다. 장마처럼 쏟아지는 날이면 더 좋다. 더더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큰 비가 오고 난 다음날의 냄새가 좋다. 물 내음이라고 해야 될까, 공기 중에 수분이 가득한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미처 땅으로 다 내려오지 못해서 어딘가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도, 비를 밟고 지나가는 차 소리도, 황색의 나무가 젖어서 밤색으로 보이는 것도 좋다.


그녀가 예전에 내게 물었다.  


'만약 내가 비라면, 나는 가랑비 같아, 장대비 같아?'      


나는 그때 그녀에게 '넌 가랑비 같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아주 살며시 젖어들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애가 나를 떠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제야 그녀가 장대비였음을 알았다. 내가 장대비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다. 큰 비가 오면 어떤 우산을 쓰든 어차피 꼼짝없이 젖는다. 내가 마음 위로 쓴 우산 같은 건 이미 그 애가 다가온 순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흠뻑 젖었던 것 같다. 이렇게 휩쓸고 나서 비 온 냄새만 남기는데도 아직도 그때가 그리운 걸 보면 너는 장대비였음이 틀림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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