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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Sep 09. 2021

민들레 홀씨를 날리면


동네 편의점에 야외 테이블에 잠시 앉아있는데 바닥이 삐걱거린다. 데크 공사가 좀 헐겁게 되었는지 한쪽이 주저앉아서 흙바닥이 드러났다. 그 틈으로 빼꼼히 민들레가 피어있다. 민들레에게 왜 하필 이렇게 뽑히기 쉬운 곳에 자리를 잡았냐고 타박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 열악한 곳까지 날아와서 끝내 꽃을 피워냈냐며 칭찬을 해줘야 될지 모르겠다.


예전에 좋아하던 그녀와 걷다가 하얀 민들레를 발견하면 꼭 홀씨를 불었다. 살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민들레 홀씨는 가벼운 바람으론 잘 날아가지 않는다. 꽤나 수고롭게 불어야 하는데도 우린 꼭 한번 불어봤다. 


'이거는 머~얼리 날려주는 게 민들레한테 더 좋은 거 아니야?'


히히거리는 그녀와 달리, 나는 딱히 민들레를 위해서 이걸 날려준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아닌데도 그냥 그렇게 했었다. 이걸 호호- 불어 대면서 왠지 우리가 다정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랬던 게 아닐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열악한 곳에 피어난 민들레를 한참 동안 별생각 없이 구경하다가 출출하기도 해서 편의점에 들어갔다. 딱히 뭘 사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눈에 띄는 게 있으면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삑-’ 편의점 계산대의 스캐너가 경쾌한 신호음을 울리며 내 간식들 바코드를 찍는다. 아르바이트생이 "영수증 드릴까요?"라고 묻길래 "네 주세요"하고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라고 해도 되건만 멍-하니 계산대 앞에 서 있다가 이렇게 무심코 받아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기껏 받은 영수증을 그대로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이 영수증은 십중팔구 쓰레기통행이 되거나 세탁기행이 된다. 훗날 주머니에 있는 게 발견되면 무사히 버려질 것이고, 깜빡하면 세탁기에 넣고 돌려지게 될 것이다. 그냥 버려지든, 깨끗하게 한 번 세탁을 해서 버려지든 영수증은 결국 버려지는 신세를 면 할 수 없다.


영수증을 보면 이 물건을 언제 샀는지, 어디서 샀는지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카드로 샀는지 현금으로 샀는지, 오징어를 샀는지 땅콩을 샀는지도 알 수 있고, 술자리 중간에 '너 취했지? 초코우유 마시러 갈래?'-라고 맘에 드는 애를 꼬셔서 지들끼리만 몰래 초코에몽을 처먹고 왔는지도 알 수 있고, “오빠 담배 끊은 거 맞아?”, “혜민아... 진짜 오빠 못 믿어?” 하면서 티격 대는 연인 간의 다툼도 오빠의 가방 안에 꼬깃하게 접혀있는 [GS25, 말보로 라이트-1, 합계: 4,500원] 영수증 한방이면 속 시원하게 궁금증이 해결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결제의 기록이자 내 발자취이기도 한 이 종이를 너무 험하게 다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든다. 


영수증은 신뢰도가 높다. 안 산 걸 샀다고 영수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 우린 그런 걸 불법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니까. 대개 영수증이 남아있다는 건 '당신은 이때 이걸 샀습니다', ‘당신은 이랬네요’라는 내 확실한 과거의 근거자료라는 소리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생일은 굳이 핸드폰을 뒤적거리거나 카톡에 뜨지 않아도 기억한다. 내가 누군가의 생일을 오래도록 기억한다는 건 나에겐 좋아함을 나타내는 영수증과 같다. 이것은 나한테는 꽤나 신뢰도 있는 지표다.


‘생일이 기억나신다고요?, 좋아하셨네요’

'생일을 깜빡하셨다고요?, 잊어가시네요’ -라고 말이다.


좋아했던 것도 언젠가 점점 멀어지게 되고, 멀어지게 되면 점점 기억하지 않게 되고, 잊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누군가의 생일도 어느새 희미해져 버린다. 신기한 건 그 영수증을 이제는 발행받을 수 없다는 사실보다, 지난 영수증으로만 확인해야 되는 사실들이 더 슬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생일이 기억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도 기억은 나지만 챙겨 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든지, 당신이 좋아하던 반찬을 보고 당신 생각이 났는데, 밥은 잘 먹었는지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든지 하는 일들이 나를 더 서글프게 만든다.


언젠가 선물 받았던 어떤 책에서, 사랑했다면 질투심이 영수증처럼 남는다고 쓰여있었다. 그러니까 질투심이 든 적이 있어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라나? 나는 그런 기분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작가도 뭔가 애틋함이 떠올라서 그랬을 거다. '영수증이 어쩌고-' 하는 종자들은 그냥 다 사랑했던 증거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인 거다. 뒤적거려서 그 증거를 찾아내지 않으면 과거를 도둑맞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사랑을 샀는데 이제 그건 온데간데없고 오직 영수증만이 내가 사랑을 했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남은 영수증을 꼬깃하게 쥐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 마음이 다 똑같을 것이다.




출근길에 또 민들레가 보인다. 이번엔 보도블록 사이에 용케도 자리를 잡고 꽃을 피웠나 보다. 봄에만 피는 줄 알았는데, 잊을만하면 드문드문 얼굴을 드러낸다. 문득 궁금해져서 검색해 보니 민들레의 꽃말은 '사랑과 감사를 드려요'라고 한다. 홀씨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누군가에게 홀씨를 보내 드리는 모습 같기도 하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 낭만적으로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나도 어느 따뜻한 땅에 닿고 싶어서 민들레 홀씨를 불었는지도 모르겠다. 


민들레는 홀씨를 날리면 더 이상 민들레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처참히 슬퍼진다. 그러나 홀씨를 날려야 또다시 민들레를 피울 수 있다. 사랑이 바람에 다 날리고 나면 여기 남은 마음은 처참해진 줄기일까 떠도는 홀씨일까, 아니면 다시 핀 민들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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