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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Sep 02. 2021

사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친구 A가 차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것이다. A는 자신이 차인 이유는, 자기가 그 사람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A는 서로 잘 맞는 것들끼리 만나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A는 때로는 자기의 모습을 비틀어서라도 그 사람에게 맞춰 주려고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녀가 자상한 사람이 취향이라고 말했다면 식당에서 그녀의 수저와 물을 먼저 챙겨준다든지,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좋다고 하면 음유시인에 잠깐 빙의한다든지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건 내가 무슨 사이코매트리 초능력자라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인간이라는 건 대체로 다들 비슷한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나는 친구들과 '사랑'같은 낯 간지러운 화제를 꺼낼 땐 항상 주의한다. 남중남고 출신인 나는 주위에 친구들이 대부분 시커먼 사내들뿐이기 때문이다. 사내아이들과는 맨 정신에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랬다간 다들 사고 회로가 고장 날 것이다. 좋게 말하면 쑥스러워할 것이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욕이 튀어나올 것이다. 들을 보고 있으면 남자들이 얼마나 사랑에 면역력이 약한 생물인지 알 수 있다. 코끝을 아주 조금만 스쳐도 알레르기에 재채기가 나오는 것과 같다. 만약, 남자를 잠 고장 내 보고 싶다면 "사랑해"라고 말해보자. 연인 사이에도 효과가 좋을 것이다. 아직 연인 사이가 아니라면 효과가 더 굉장할 것이고, 같은 남자끼리라면 효과가 더더욱 굉장할 것이다. 그래서 저런 주제는 술이 조금 오른 자리에서 던져야 한다. 그러면 속에만 감춰놨던 사랑의 지론을 한 두 마디씩 툭툭 거들다가 이내 봇물 터지듯  쏟아낸다. 슬쩍 던진 미끼를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덥석 무는 것이다.


아무튼 A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A는 사랑이야기를 할 때, 사랑에 빠지려면 서로 꼭 맞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줄곧 내세웠지만 나는 그때마다 동의할 수 없다며 반박했다. 닮아서 좋다는 광고도 있고, 반대가 끌리는 이유라는 노래도 있듯이 사랑의 원인을 파헤쳐보면 다들 제각각의 사연이 존재한다. 그래서 닮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잘 맞는 사람인지, 잘 안 맞는 사람인지는 사랑에 빠지는 것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수챗구멍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어떤 이는, 과거에 떠난 사람을 늘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건네는 사랑과, 이미 떠나 버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리고 결국 내 곁에 머물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애가 떠난 이후 나는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보내기 위해 아주 길고 긴 편지를 썼다. 하루에 다 쓰지 못해 며칠 밤을 썼다. 어떤 날은 종이를 채우다 까무룩 잠이 들기도 하고, 어디까지 썼는지 기억이 안 나서 다시 쓰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북북- 찢고 새로 써내려 갔다.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늦은 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기다리던 그녀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그녀가 나의 정성에 감동해 마음을 돌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긴 통화를 했다. 끝에 그녀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건 아주 힘이 센 마음이야, 그래서 나는 이 미안함을 안고 너를 같이 껴안을 수가 없는 거야’

보이지 않을 애의 얼굴이 수화기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사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수챗구멍 때문이다. 욕조에 수챗구멍을 막아 놓으면 물은 가만히 차오르기만 한다. 그러다 수챗구멍을 열면 맹렬하고 역동적으로 물이 움직인다. 사랑도 이와 같다. 빈 틈 없는 마음엔 아무리 뜨거운 것이 차올라도 빠져져 나갈 구멍이 없다.


‘나는 상처가 많은 조개껍데기 같아서 아무도 나를 줍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고, 이 것이 내가 그 애에게 빠지기 시작했던 결정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무거운 물체 퍽- 하고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잔잔히 차오르던 마음이 급격히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깨질 것 같은 틈으로 내 마음이 와락 쏟아질 거라는 징조였다. 어렸을 때 나는 기쁨만이 가득한 사랑을 꿈꿨다. 어떤 장점 때문에 누구와 사랑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지, 슬픔이나 결핍 때문에 사랑하고 싶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일 때는 절대 알 수 없다가 균열이 생겨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대로 예쁘게 다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어찌할 바 없이 쏟아지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은 고장 난 수도꼭지 같아서 아무리 세게 잠가도 물이 새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것이 아니라 곳이 필요하다. 욕조를 채워줄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쏟아질 곳 말이다. 우리는 때로 누군가가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칠칠치 못하게 부딪혀서 자주 멍드는 모습에 속상하기도 하고, 이번 달 생활비와 다가오는 애인의 생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의 모습을 보고 눈물짓기도 한다. 보기에 조금 이상하고 신경 쓰이고 아픈 순간들, 나는 그런 틈을 발견하는 , 내 사랑이 그쪽으로 달음질하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한 번 그 사람 쪽으로 수챗구멍이 열리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 없어진다. 병상에서 오랫동안 아픈 사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감정이 메말라 있을 것 같은 사람, 어두운 과거를 가진 사람 등. 주변에서 '왜 그런 사람을 사랑을 하냐?'라고 말려도 타인에게는 설명할 수 없다. 프로야구 보면서 '내가 발로 던져도 저거보단 잘 던지겠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만, 관중석에선 마운드에 선 투수의 마음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내가 주고 싶어 주는 게 아니라 그냥 그쪽으로 쏟아지고 있는 건데 뭘 어떡하겠어. 


물론 이런 게 사랑인 줄 잘 몰랐던 그 시절나는 그저 그 애를 향한 마음을 앓기만 했을 뿐이다. 그 애를 보면서 늘 궁금했다. 왜 굳이 아픈 추억을 꺼내어 들쑤시는지. 떠난 사람이 다시 자기를 찾아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왜 창문 밖을 한 번 더 내다보는지. 그때 그녀에게 나는 아마 마운드 바깥, 저철창 너머에 있는 관객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꾸는 정원이 있는데 나는 그 애의 정원에 몰래 들어가서 다시 꽃도 심고 물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어쩐지 속절없이 아팠다. 저 문 바깥에 있을 땐 모르던 마음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가꾸지 않 망가진 화단을 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쓸어내릴 때에도, 네가 이미 시들어 버린 행복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정원을 서성일 때에도, 나는 그걸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리 너를 사랑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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