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이혼하지 그랬어" 어린 딸의 철없는 소리
남편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돌 무렵의 딸이 소파를 한 손으로 짚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딸의 표정은 놀랍게도 웃는 표정이었다.
입꼬리를 한껏 땡겨서 웃는 입을 하고, 눈은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며 잘게 떨렸다.
딸은 잠시 굳는 얼굴을 하고서는 다시 웃음을 억지로 지어보였다.
나와 남편은 아차 싶은 마음에 딸에게 급히 다가가 꼭 안아주었다.
서로에게 하려던 날선 말들은 아이의 표정 앞에서 채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채 삼켜졌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딸 아이의 겁에 질린 웃는 표정이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돌도 안 된 아이가 부모의 말싸움을 인지하고 눈치를 본다는 것이 놀랍고도 가슴 아팠다.
유년시절, 매일 싸우던 부모님의 모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니,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 날 이후로 아이 앞에서 사소하게라도 싸우는 일이 없도록 서로 간에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지금은 다행히 평화로운 날들이 유지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서로 싸우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죽도록 밉다고 하면서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의 뒷담화를 하다가도 "그래도 네 아빠가.." "그래도 네 엄마가.."로 마무리되는 대화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나는 종종 엄마에게 "그럴거면 차라리 이혼하지"라며 철없는 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많은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그렇다. 부부싸움은 쉽게 진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의무와 책임, 서운함과 고마움, 고운정과 미운정, 측은지심과 동병상련 등 여러가지 역설적인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식'은 부부가 서로 참고 사는 이유가 되었다가도, 때론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치동에서 내 입시에만 메달리던 엄마의 그 열정이,
결혼을 하고나자 부부관계의 맥락에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공부에 욕심이 많았지만 넉넉치 못한 집안사정으로 인해 상고(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엄마는, 공무원이던 아빠를 만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시작하셨다. 옛날 사진을 보면, 한칸 짜리 단칸방에 달린 세모난 부엌에서 젊은 모습의 엄마가 앞치마를 메고 밥을 짓는 장면이 있다. 그 작은 집에서도 무엇이 그리 즐거우셨는지, 신혼초 생기 넘치던 엄마의 웃음은 그러나 사진첩을 넘길수록 점점 사라져 갔다. 5살짜리 내가 옆에 서있는 시절 쯤의 사진에서는, 엄마는 굳은 표정으로 아이를 두 손으로 꼭 안고 계셨다. 마치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들고 계신 듯이.
엄마와 아빠는 늘 싸우고 서로를 때리고 물건을 던졌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엄마는 항상 아침밥을 차렸고, 아빠는 주말과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다. 아빠는 밤이 되어서 돌아오신 뒤에도 항상 놀이터에 나가 놀아주셨고, 엄마는 그 흔한 어린이집도 한번 맡기지 않고, 늘 삼시세끼를 배 터지게 차려주셨다.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부모님의 일상이,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야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결혼하시기 직전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친엄마의 보살핌 없이 아이를 출산하고, 밥 한끼 안해주는 정없는 시댁에서 산후조리를 하면서 엄마가 겪었을 외로움은 내가 출산을 경험하기 전에는 미처 헤아리지도 못했던 감정이다.
연차가 쌓이면서 아빠가 회사에서 좋은 보직으로 옮겨가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도, 엄마의 노동 자체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로지 의무와 책임으로만 가득 차있었던 엄마의 삶에, 아이의 성장은 몇 안되는 삶의 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맹모삼천지교라 했던가. 엄마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군이 좋은 곳으로 집을 옮겼다. 나는 초등학생 동안 학교 3개를 옮겨다녔고, 5번이 넘는 이사를 했다.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갈수록 집의 평수는 점점 좁아졌다. 26평에서 17평, 이후에는 15평으로 줄어들자 안방과 거실이 합쳐졌고, 하나 남은 방은 내 공부방이 되었다. 우리 집의 비밀번호는 언젠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자는 염원을 담아 17-26-32라고 지었고, 매일 현관을 열 때마다 희망을 담아 번호를 눌렀다.
언제 이사를 할지 모르는 유목민의 삶이기에 소파나 식탁, TV, 침대 같은 제대로된 집안 살림 없이 최소한의 가구만 집에 남았다. 집에 가구라고 할만한 것이라고는 피아노와 내 공부책상, 전집책과 문제집이 빼곡하게 들어찬 책장 뿐이었다.
최고의 학군지를 쫒아 다닌 끝에, 나는 결국 강남 8학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는 두 가지 유형의 친구들이 있었다. 원래부터 강남에 살았던 친구들과, 나처럼 대치동 유학을 온 친구들로 나뉘었다. '본투비 강남파' 중에서도 금수저면서 학구열이 높은 집안의 친구들은 소위 '대치동 유학파'보다도 더한 프리미엄 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일반 학원을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최상위권 3~4명으로 그룹 스터디를 구성하여 재수학원 2타 강사를 섭외해 개인 교습을 받았다. 국영수가 이미 만점이라 전략과목 점수를 확보해야 했기에, 한자나 일본어 같은 제2외국어에 관한 과외자료를 쉬는시간마다 들고 다녔다. 방학에는 학원비가 한 달에 천만원 가까이 되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다.
내신 등급은 같은 학교 내에서 경쟁하는 상대평가로 이루어졌기에, 족집게 내신으로 유명한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은 학원에서 나눠준 유인물을 손이나 가림판으로 가린 채로 공부했다. 학교에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다른 친구들이 혹시라도 뒤에서 엿보지 않도록 자료를 동글게 말아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도 했다. 쉬는시간에 다른 친구가 자료를 훔쳐갈까봐 항상 화일에 넣어 손에 들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성적은 아주 높지 않지만 집이 여유로운 친구들은 성악이나 작곡 같은 예체능으로 진로를 바꾸거나, 일본유학을 준비하기도 했고, 특례 전형을 노리기도 했다. 특례 입학 전형은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올수록 경쟁률이 낮아지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오래 하고 온 친구일수록 입시에 여유가 느껴졌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믿는 구석 하나 없이 오로지 수능 성적 하나로 살아남아야 했다. 엄마는 보험 담보 대출과 카드대출을 받아가며 대치동 학원비를 대셨고, 아빠는 15평 집에 월세가 없어서 급전을 구하기 위해 문닫힌 은행에 뒷문으로 뛰어 들어가시곤 했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우리 모녀는 "내가 시험을 못보면 우리 집은 그대로 망한다."는 말을 구호처럼 외쳤다.
고3 6월 모평이 끝났을 때즘이었나, 나는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 얼마나 대학을 잘 가야해?"
엄마는 씁쓸한 표정으로 답하셨다.
"서성한이면 그냥 그런거고.. 중경외시면 재수해야지."
"선생님이 나 S여대 지원하라고 말씀하시던데?" 라고 하니,
대충 나가 죽으라는 답변을 들었던 것 같다.
고3, 우리 가족은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대치동에 모인 학부모들에게는 각자의 다양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에게 대치동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전재산을 투자했던 곳이다.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사투했던 곳이다. 그런데 그 시작이 진정 '아이의 꿈'을 이루기 위했던 것이었을까? 간절히 꿈을 이루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른이 되어서야 그 치열함 이면에 감추어진 외로움이 느껴진다.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기 직전까지도, 그저 속도가 빨라지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